가장 난해한 ‘이상 문학’ 연구 작업의 총결산

이상 연구/권영민

이준영 선임기자 gapi@busan.com

입력 : 2019-09-26 18:14:00수정 : 2019-09-26 18:14:28게재 : 2019-09-26 18:14:59 (부산일보 21면)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1910~1937)은 한국 문학에서 한 줄기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줄기의 생김새와 뻗어 나간 방향을 정확히 아는 이는 드물다. 그렇기에 많은 연구자의 도전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적지 않은 이들을 좌절하게도 만든다.

작가, 대학 초년생 때부터 이상에 매료

텍스트에서 그림까지 모든 자료 집대성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평생 이상 연구에 매달린 학자이다. 다른 국문학 연구서도 내놓았지만, 이상을 향한 열정은 분명 남달라 보인다. 권 교수는 스스로 신간 〈이상 연구〉를 이상 문학에 대한 연구 작업의 총결산이라고 밝히고 있다. ‘총결산’이란 표현은 일련의 연구서들이 이미 있다는 시간적 의미를 전해준다. 그렇다. 그동안 권 교수가 펴낸 연구서들은 그의 노력을 짐작하게 한다. 어찌 보면 사람을 빨아들이는 이상 문학의 마력이 그를 붙들어 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권 교수는 대학 초년생부터 이상에 매료됐다. 대학천 변 서점에서 펼쳐 들었던 임종국 편 〈이상 전집〉이 평생의 과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는 1997년 월간문예지 편집 주간을 맡으면서 이상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그때 연 학술대회는 이상을 새롭게 조망하려는 야심 찬 기획이었다. 이 학술대회는 수학자가 본 이상, 시각디자인이 본 이상, 정신분석학자가 본 이상, 철학자가 본 이상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상 작품이 이처럼 다층적이고, 다원적이라는 의미이다. 이 결과를 한데 모아 〈이상 문학 연구 60년〉을 펴냈다. 이후 〈이상 전집 1·2·3·4〉 〈이상 텍스트 연구〉 〈이상 문학의 비밀 13〉 〈오감도의 탄생〉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 작업의 결산 성격을 띤 〈이상 연구〉는 인간 이상에서 작가 이상에 이르기까지, 텍스트에서 그림에 이르기까지., 이상 문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자료를 집대성하고 있다. 이 책은 또 절판한 〈이상 텍스트 연구〉를 대폭 수정하고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을 보완하는 성격도 갖고 있다.

실험과 전위의 상징, 신화적인 독창성을 가지면서 한국 문학사상 가장 난해한 동시에 가장 사랑받는 작가 이상. 하지만 원전의 불확실성, 작품 해석의 자의성, 개인 삶의 신비화는 가뜩이나 난해한 이상의 작품의 참모습을 가리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노학자의 끈기가 이러한 안개를 확 거둬내면서 이상이란 큰 줄기를 우리에게 명료하게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된다. 권영민 지음/민음사/808쪽/3만 원. 이준영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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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소확행(小確幸)’

 

1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그의 수필에 만들어 썼던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말이 널리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말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으로 풀이되지만 일본어사전에 올라 있는 말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들어 낸 신조어(新造語)이기 때문이다.

소확행이라는 말은 1986년 일본 광문사(光文社)에서 발간한 하루키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 (ランゲルハンス午後)>에 처음 등장한다. ‘서랍 속에 반듯하게 개어 말아둔 깨끗한 팬티가 가득 쌍ㅎ여 있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작기는 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하나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는 さいけれどもかな(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을 그는 줄여서 소확행[小確幸, しょうかっこう]’이라고도 썼다. 그런데 실제로 이 말을 책의 표지에 노출시켜 광고한 것은 그가 19965월 신조문고(新潮文庫)로 펴낸 수필집 <うずまきのみつけかた>이다. 이 제목을 무어라고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표지에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문구를 줄임말로 쓰지 않고 그대로 표시하기도 했다. 이 수필집은 하루키가 미국 하버드대학이 자리잡고 있는 보스턴 근처의 케임브리지에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체류했던 체험기를 중심으로 하여 적은 것이다. 당시 하루키는 보스턴 마라톤에도 직접 참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에서도 생활 속에 개인적인 소확행(비록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다소간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아주 심한 운동한 후에 찬 맥주를 마시면서 음, 맞아, 이것이다 하고 혼자서 눈을 감고 무심코 중얼거리는 그런 감흥이라든지...’하는 구절이 본문 속에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소확행이라는 말은 벌써 수년전에 타이완에서 굉장히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타이완에서 이 말이 유행한 것은 2014년 무렵이다. 타이완에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가 우리나라 못지않게 많기 때문에 하루키가 만들어낸 이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이 말은 타이완에서 먼저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유행어가 되었다. 그러자 책의 이름, 상품의 광고, 심지어는 회사의 이름까지도 소확행을 쓸 정도가 되었다. 급기야 타이완 총통 선거 중에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비판하는 연설도 등장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는 가운데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하도록 만드는 소확행이라는 말이 시대적 요구와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제는 소확행이 아니라 대확행(大確幸)’을 요구해야 한다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우리나라에는 소확행이라는 말을 문학사상사가 일찍 소개한 바 있다. 문학사상사에서 2001년에 출간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은 그 제목 자체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한 바퀴를 돌아 타이완에서 유행하다가 지금은 한국사회의 새로운 트렌드를 대변하는 말처럼 굳어지고 있다. 2018년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에서 대한민국 소비 트렌드를 나타내는 말로 이 말을 지목했다고 크게 보도한 바 있다. 물론 이 말과 함께 미닝아웃(Meaning out, 소비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신념을 표현하는 행위)’, ‘케렌시아(Querencia, 일상적 삶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나 그러한 공간을 찾는 경향)’ 등도 거론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도 여전히 소확행이 여기저기서 화제거리로 등장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심지어는 소비 트렌드를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의 삶의 자세나 가치관을 말해주는 용어로 확대 해석되는 경우도 많다. 일본의 언론에서조차도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들어낸 소확행이 한국사회의 현실적 단면을 보여주는 키워드가 되었다고 보도할 정도다. 젊은 세대가 취직하기는 어렵고 돈벌이도 쉽지 않아서 삶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모두 버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의 만족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설명도 그럴듯하다.

실제로 최근의 한 조사에서는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소확행’ ‘워라벨’ ‘욜로등의 신조어가 그들의 삶의 방식을 말해주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소확행은 물론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인데, ‘워라벨(work)’(life)’조화(balance)’를 뜻하는 영어 단어를 합하여 하나로 줄여놓은 신조어다. ‘욜로라는 말은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를 뜻하는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따서 줄여놓은 말이다. 현재의 자기 삶에서 느끼는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여 소비하는 태도를 뜻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지장으로 주거나 영향을 받지도 않고 자기만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취업포털 커리어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요즘의 젊은 구직자들이 소확행’(51.8%) ‘워라벨’(30%) ‘욜로’(18.2%) 등의 순으로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패턴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근래 흔히 삼포세대로 불리기도 하는 한국 젊은 세대들이 성취가 불확실한 취업, 결혼, 육아, 내 집 마련 같은 큰 행복을 좇기보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찾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삶에서 거창한 목표나 꿈을 접어버리고, 불확실한 행복을 좇기보다는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이 강해졌다는 말이다.

 

2

 

소확행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무리카미 하루키는 전 세계에 수백만의 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세계적인 작가이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렇게 명성을 얻게 된 과정은 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초반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가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때만 해도 일본의 평단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아주 인색했다. 일본 문단은 하루키의 소설을 그저 한때 대중 독자들의 인기를 모으는 통속적인 소설 정도로 받아들였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 문학사상사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는 태도에 대해 일본 출판계도 의아스러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를 비롯하여 <해변의 카프가> <태엽 감는 새> <댄스 댄스 댄스> 등이 잇달아 출간되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젊은 세대를 사로잡았고 그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때마침 한국 문단은 1980년대까지 이어왔던 역사와 현실을 중시하는 소설의 이른바 거대담론이 정치 사회적 민주화의 확립 과정 속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주도했던 젊은 계층은 개인적 삶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전 세대와 달리 정치사회적 민주화를 통해 개인적 삶의 질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독자들이 만나게 새로운 소설적 세계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보면, 한국의 소설에서 흔히 만났던 인물의 사회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던 여러 가지 징표들이 모두 지워져 있다. 오히려 일상적 삶의 현실 자체가 인물의 성격을 해체한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인물은 그 개인적 존재와 삶의 현실 사이에 애매한 긴장이 가로놓여 있지만 대체로 그 사회적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예컨대 <상실의 시대>에는 30대 중반을 넘어선 사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설의 이야기는 라는 주인공이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 안에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거의 20년이 지나버린 19살 때의 나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첫사랑의 아득한 기억과 그 기억 속에서 끌어올려지는 것들은 사랑의 아픈 실패와 친구의 자살 등으로 회색빛으로 바뀌어버린 젊음 시절의 풍경이다. 이 소설에서 감촉되는 도시적 감각,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내적 고뇌, 청춘의 방황과 아픈 사랑 등에는 역사라든지 현실이라든지 하는 시대의식 자체가 담겨져 있지 않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극히 파편화된 개인들이며 이들이 겪는 삶의 허무감이 소설의 전체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세계문학의 무대로 끌어올린 <태엽 감는 새>는 직장을 그만 둔 사내를 화자로 등장시켜 놓고 있다. 그는 도쿄 교외에 있는 집에서 아내가 일하러 나간 사이에 하루 종일 혼자 뒹군다. 1930년 이상의 소설 <날개>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이 소설의 이야기는 부조리한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주인공의 삶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 소설에서는 개인의 삶의 사회적 조건을 어느 정도 규제해온 가정이라는 사회단위가 아무런 구속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직장을 벗어나고 가정으로부터 유리됨으로써 기성적 질서로부터 해방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적인 인물 설정은 소설적 서술의 기법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우선 행위의 인과적 논리가 철저하게 거부되고 있으며, 구성의 원리라고 하는 고전적인 소설적 규범도 무너지고 있다. 상황의 끊임없는 변화와 그 내밀성을 천착하기 위해 이야기는 해체되고, 잡다하게 변화하는 현실의 임의적인 환상들이 닥치는 대로 그려진다. 소설속의 이야기는 모두 단편적인 것이 되고 행위는 연속성을 벗어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보여주는 이러한 새로운 기법은 경험적 현실 세계의 다층성과 가변성, 그리고 그 불연속적인 자의성을 드러내기 위한 고안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력의 전환이 한국 독자들에게는 산업화 과정과 민주화 운동을 추동했던 거대서사의 소멸이라는 소설적 변화와 맞물리면서 크게 충격을 던져준다. 하루키 열풍이 일어나게 된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소설이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주제의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동안 이미 독자들은 하루키의 소설의 새로운 상상력과 그 기법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이후 지난 30년 동안 2, 3년에 한두 편씩 화제의 작품들을 줄곧 내놓았다. 소설가로서 끈질기게 글을 쓰는 일로서 자기 존재를 스스로 입증해 온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독자 대중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자신만의 다양한 취미활동도 꾸준히 실천한다. 직업으로서의 작가라는 위치를 잠시도 잊지 않고 그는 자신을 조련하고 있다. 자신의 체력을 위한 스포츠 활동, 세계의 여러 지역에의 여행과 그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 음악에 대한 폭넓은 이해, 세계 각국의 다양한 요리와 술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는 적당하게 어물적 넘기는 법이 없이 언제나 전문가답게 자신을 보여준다. 이 같은 소설가로서의 프로 근성과 끈질긴 탐구력은 세계의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장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에서는 그가 동원하고 있는 모든 소재와 대상이 풍부한 이야기거리로 살아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오랜 전통 속에서 소설의 양식이 추구해온 서사의 문법을 자신의 방식으로 고쳐놓고 있다. 그는 과거의 소설이 집착했던 방식대로 인물을 통한 사회 역사적 특수성의 발견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본인이라고 성격지워 말하기 어려운 특이한 개성의 인물들이다. 그들은 비록 일본인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지만 세계화시대를 살아가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구태여 그들에게 어떤 지역성을 언급해야 한다면 세계인이라는 명명이 오히려 더 설득적일 수가 있다. 그들의 삶의 태도나 사고방식은 뉴욕의 어느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와도 비슷하고 파리의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젊은이와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한 젊은이들은 서울의 홍대 앞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러한 개성적이지 않은 특이한 개성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소설에서 창조해낸 성격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문(美文)의 스타일리스트는 아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하나의 의미를 지탱하기 위해서 그가 발굴하고 있는 흥미로운 소재뿐만 아니라 그 소재를 어떻게말해야 할 것인가를 고심한다. 화제작이었던 <해변의 카프카>는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magic realism)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듯이 자기 소재를 재해석하여 배치하고 있다. 이 소설의 이야기에서 갈피를 잡아내기 어려운 사건들의 중첩과 충돌, 가족이라는 유대감을 상실한 채 떠도는 인간의 삶의 도정은 궁극적으로 삶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허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질문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어떻게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는 그 소설적 미학을 논할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고심하고 있는 어떻게의 문제는 대상을 파악하고 주제를 형상화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떻게의 문제는 일상의 소재를 소설이라는 예술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방법인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묘사의 매력보다는 서술의 힘에 의존한다. 일본 소설이 하나의 전통처럼 내세웠던 섬세하고도 예리한 언어 감각과 문체를 하루키는 별로 활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쉽고 활달하게 서사를 전개시키고 이야기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고 이를 이어가는 서술에 힘을 기울인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이야기는 특정의 장면이나 특정의 사물에 묘사가 집중되어 이야기의 진행과 흐름이 멎어버리는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특정 대상에 대한 지배적 인상의 묘사적 표현보다는 다양한 시각의 서술이 이어진다. 결국 소설의 이야기는 어떤 경우 빠르게 어떤 경우는 느리게 진행되면서도 그 장면의 전환을 쉽게 이루어나간다. 이 평이한 문체를 통한 서술의 힘을 바탕으로 하루키는 그가 선택한 소재를 중심으로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는 이야기의 힘을 따라가는 이야기꾼이지 언어의 정교함과 섬세함을 자랑하는 스타일리스트는 분명 아니다. 아마도 이러한 특징이 오늘의 세계문학 독자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매료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세계화라는 거대한 전환의 물결 속에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지역과 종족과 언어의 경계를 뛰어 넘어서 소설이라는 양식이 거두어들이고 있는 특이한 문화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등장이 한국 소설에도 기법과 정신의 전환을 새롭게 제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은 과장된 설명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에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우리 작가들의 경우 대부분이 하루키 소설에 빚지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0년대 한국 소설 독자들을 매료시키면서 세계문학의 무대로 도약했으며 한국의 소설도 하루키를 만나면서부터 소설의 방법 자체에 대한 반성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3

 

무리카미 하루키는 일본 작가이지만 이제 세계적 지성으로 그 목소리를 누구나 경청한다. 그가 두어 해 전에 동아시아의 문화적 연대를 강조하면서 일본과 중국을 둘러싼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문제, 한국과 일본의 독도 문제로 빚어진 분쟁을 두고 했던 말도 다시 생각난다. 그는 영토갈등을 둘러싼 갈등과 그 광적인 반응이 마치 술 취한 사람의 행동을 닮았다.’ 라고 꼬집으면서 지성의 부재를 논박했다. 하루키는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진 한국 중국 일본 사이의 문화교류가 문화적 등가교환임을 천명하면서 이러한 문화 교류야말로 국경을 넘어 영혼이 오가는 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시대의 양심으로 세계적 지성으로 존경받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정치적 현실 문제를 바라보는 예지(叡智)와 통찰력 때문임은 물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들어낸 소확행이라는 말이 타이완에서 유행어가 되고 한국의 젊은이들의 삶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지성인으로서의 말과 행동, 그리고 세계적 작가로서의 놀라운 상상력, 인간과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 등으로 본다면 이런 경향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이 삶에서 추구해야 하나의 목표를 말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소확행이라는 말 자체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상업주의적으로 새로운 의미까지 덧붙여져 부추겨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루키는 일상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작은 행복이란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누리며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테니스 코트에서 신이 나게 테니스를 치고 나서 차디찬 맥주를 들이키는 기분이라든지, 샤워를 마치고 포송한 새 내의를 갈아입으면서 느끼는 상쾌한 기분이라든지, 아파트 정원을 걷다가 보도블럭 사이에서 키 작은 노란 민들레꽃이 막 피어난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경이로움 같은 것은 우리가 그 가치를 놓치고 있던 감정들이다.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소확행도 바로 그런 것들이다. 갓 구워낸 식빵을 손으로 찢어먹을 때 느끼는 신선하고도 고소한 맛이라든지, 서랍을 열었을 때 새 팬티가 착착 잘 접혀서 가지런히 쌓여 있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그런 기분을 그는 소확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소한 즐거움이나 기쁨의 감정은 일부러 그런 것을 추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즐기는 그런 기분이다. 요즘의 젊은 세대가 삶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포기하고 소확행에 집착한다거나 자기들이 이루어낼 수 있는 작은 성취에 민족하면서 살고 있다는 식의 해석까지 여기에 덧붙여지는 것은 오히려 하루키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을 생각하면서 요즘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들이 겪는 힘든 삶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젊은이들이 아무 대책도 없이 마치 무능력자처럼 사회의 한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이다. 이 같은 현상은 매일 같이 귀가 아프도록 들으면서도 뾰족한 방안을 내놓지 못하는 미세먼지보다 더 심각한 과제이고, 트럼프와 김정은이 다시 만나는 2차 회담보다 더 중요하다. 이런 문제를 우선적으로 책임져야 할 정치인들은 여전히 입 바른 소리만 뱉어놓으면서 파당적인 이익만 따지고 말로만 청년 일자리 수만 개를 만들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그런 속에서 어두운 현실에 좌절하면서 무기력에 빠져버린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삼포세대오포세대하면서 자기 비하에 빠져들어 있다. 이 환멸의 시대를 스스로 견디어 내는 젊은이들이 참으로 딱하다. 경제가 위기라든지 일자리가 부족하다든지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 해에 수십만의 대졸 학력자가 쏟아져 나오는데 이제 와서 취업의 눈높이를 낮추라고 훈수하는 것은 그들을 그렇게 키워낸 사회의 책임 회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젊은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최우선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미래의 한국 사회를 새롭게 이끌어갈 이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와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기성세대의 시대적 임무에 대한 거역이다. 젊은이들이 삶의 꿈을 상실한 채 모든 것을 포기한 세대라고 스스로 자신들의 처지를 비하하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지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좋든 싫든 우리 사회의 미래는 이들의 손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 세대가 일어설 수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미래의 주역들에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고 자기 삶에 대한 권한도 부여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어떻게 사회를 떠맡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고 있는 소확행은 삶의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상태에서 일상적 현실의 삶 가운데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자잘한 행복감이다. 우리 젊은 세대가 지금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일상의 소소한 작은 행복이 아니다. 그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생존 자체를 위기로 체감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생활 태도라든지 소비 트렌드라는 것을 소확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본의와는 너무 다르고 별로 설득력도 없어 보인다. 한 끼의 식사조차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인 이들에게 갓 구워낸 식빵의 고소하고도 신선한 맛을 느끼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루 종일 고시촌 구석방에 틀어박혀 문제집과 씨름하고 있는 젊은이가 서랍 속에 가득 새 팬티를 가지런히 개어 넣어두고 그걸 꺼내어 입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겠는가? 그들이 어떻게 한가롭게 테니스를 즐기고 기분 좋게 맥주를 들이키며 소소한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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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6 03:00:00 편집

 

“시인 이상, 조선인 엔지니어 모임 ‘조선공학회’ 임원 활동”

권영민 교수 23년 결실 ‘이상 연구’ 내달 중순 출간

 

권영민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석좌겸임교수는 “이상은 미술, 영화, 건축, 문학이라는 장르를 초월하고 경계를 허물었다”면서 “이상이 당대 서구 문화의 전환을 인식하고 이를 자기화하면서, 1930년대 우리 근대문학의 한 부분이 서구의 첨단과 거의 비슷한 문학적 감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일본 고등계 경찰의 비밀 보고 문서를 하나 찾았어요. 시인 이상이 조선인 엔지니어들이 결성한 ‘조선공학회(朝鮮工學會)’에서 1930년 임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이상, ‘날개’에서)에 날개를 다는 건 후인들의 몫일 게다. 문학평론가인 권영민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석좌겸임교수(71)가 2020년 이상(1910∼1937) 탄생 110주년을 앞두고 ‘이상 연구’(민음사)를 다음 달 중순 출간한다. 이상을 23년 동안 연구한 결과를 결산한 책이다. 권 교수는 책 머리말에 “그(이상)의 글들은 … 텍스트의 상호연관성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산한다”고 썼다. 이상은 죽었지만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한 권 교수를 19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이번 책 ‘이상 연구’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

“이상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질적인 세계를 융합한 21세기형 지식인이다. 20세기 초 과학기술의 획기적 발달, 미술에서 표현주의 이후 입체파의 등장, 문학의 심리주의적 경향 등 문명의 전환기적 상황을 깊이 있게 관찰하면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구축했다. 일례로 연작 시 ‘오감도’는 정서적 요소를 제거하고 핵심 개념만 아주 단조로운 문장으로 남겼는데, 이는 미술의 추상 기법과 연결된다. 단편 ‘지도의 암실’ 등에서는 자신이 본 영화의 에피소드나 장면 전환 기법을 소설에 도입했다. 이런 면모를 텍스트를 통해서 확인했다.”

―이상 문학의 위상은….

시 ‘오감도’, 소설 ‘날개’ 등을 쓴 이상. 동아일보DB

“이상은 문학적 감각, 감성을 변혁하고자 했다. 그의 문학은 전통적 문학 형식과 결별하면서 개인적 주체로서 작가 자신을 타자처럼 객관화해 그 내면 의식을 보여준다. 한국문학의 모더니티 인식은 이상 문학의 등장과 함께 성격과 방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대 독자들은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상은 개인의 삶이 식민지 지배 권력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고, 가치가 전도되는지를 흥미롭고 파격적으로 드러냈다. ‘작은 알갱이의 문학’을 한 것 같지만 그를 통해 보이지 않는 전체를 드러냈던 것이다. 당대 독자뿐 아니라 작가들도 이상을 낯설어했다.”

―‘식민지 근대’의 문화적 특징은….

“호미 바바(70·인도 출신의 문학평론가) 같은 탈식민주의 문학론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식민지 문화는 숙명적으로 양가성을 가진다. 지배 권력과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지향이 한 축 위에서 팽팽히 긴장하며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가성을 인정하는 통합적 안목이 필요하다.”

이상은 일본인 학생들을 제치고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고공) 건축과를 수석 졸업한 뒤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기사로 채용됐다. 권 교수는 1930년 6월 26일 종로경찰서장이 경성지방법원 담당 일본인 검사에게 보낸 ‘경종경고비(京鍾警高秘)’ 문서에 이상의 본명 ‘김해경’이 조선공학회 임원으로 등장한다는 걸 새로 밝혀냈다. 권 교수는 “이상이 일본인 중심의 조선건축회에 정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던 중에 조선공학회에 가담한 사실은 조선인 건축기사로서 지니던 자기 정체성의 인식과 연관되는 문제여서 주목된다”고 말했다.

1929년 3월 3일 한국인 엔지니어들의 ‘조선공학회’ 창립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3월 5일자 지면. 이상이 이듬해인 1930년 이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동아일보DB

조선공학회는 어떤 단체였기에 일경의 감시 대상에 올랐을까. 1929년 2월 3일 발기인총회를 열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공학회의 설립―조선인 공업 발전에 진력하라’(1929년 2월 12일)라는 사설을 쓰며 특별한 기대를 표시했다. 중외일보 보도에는 조선공학회가 1930년 8월 연 평안북도 선천(宣川) 강연회에서 “그중 연사 유용선 군은 경관의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강연을 끝맺지 못하고 부득이 중지하고 말 때에 일반 청중은 박수갈채로 강연을 계속하라고 소동하였다”고 나온다. 조선공학회가 공학과 기술의 실력 양성을 주장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했을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권 교수는 2014년부터 버클리대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대학 동아시아어문학과 내에 2023년 정식으로 한국학 전공을 개설하는 게 권 교수의 목표다. 어쩌다 종일 우리말을 한마디도 못 하는 날에는 혼잣말로 “이 형(이문열 소설가)” “윤 형(윤후명 소설가)”을 부르며 그들과 소설에 대한 상상의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왜 고생을 사서 하시느냐’고 묻자 “한국문학의 좁은 영토를 넓히고자 한다”며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깊이 있게 공부한 고급 독자층의 저변을 넓혀야 한다”고 답했다.

권 교수는 그간 한국문학 수업에 영어 교과서로 쓸 만한 책을 집필해왔다. 그 성과로 브루스 풀턴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와 공저한 ‘What Is Korean Literature’(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올가을 버클리대에서 출판한다. 권 교수가 같은 목적으로 집필하고 있는 ‘Modern Korean Literature’(한국 현대문학)는 하버드대에서 출간이 결정됐다고 한다.

권 교수는 “한국문학이 본격 번역되기 시작한 것도 불과 20년 정도고, 해외 일반 독자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면서 “한국 독자가 좋은 작품을 더 많이 읽고 지지해줘야 글로벌 작가가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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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찾은 김기림의 시 5

 

김기림이 해방 직후에 발표한 씨 5편을 발굴하여 공개한다. 기존의 자료에 실려 있지 않은 작품들이다. 필자가 현재 작업하고 있는 [김기림전집 전4](민음사, 2019년 출간 예정)의 새로운 출간을 위해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새로 찾은 작품들이다.

김기림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에는 고향 근처인 함경북도 경성 소재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영어를 가르쳤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서는 임화, 이태준, 김남천, 이원조 등이 주도했던 조선문학건설본부에 가담하여 새로운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462월 조선문학건설본부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흡수하여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되면서 좌익문단의 대표 조직으로 등장했다. 김기림은 이 단체의 중앙집행위원 및 시부 위원장이 되었고, 조선문학가동맹 서울지부 위원장을 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해 9월 경성대학(국립 서울대학교 전신)에서 문학 강의를 시작했다. 1948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까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던 상당수의 문인들이 활동무대를 북한의 평양으로 옮기면서 이른바 월북 문인이 되었지만 김기림은 월북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문학가동맹 시대의 활동을 청산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사상적 전향을 선언한 후 한국문학가협회의 정식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과 함께 북에서 내려온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연행당한 후 9. 28 수복 직전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그의 행적은 그 뒤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없다. 1988년 월북문인 해금 조치 이후 문학사에서 그의 문학적 위상이 주목되면서 다방면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번에 새로 발굴한 작품들은 모두 해방 공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김기림이 서 있던 문단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울어라 인경아는 해방 직후 창간된 신조선보(新朝鮮報)(1945. 12. 27)발표한 작품이다. 1945해방을 맞은 을유년 제야에 종로 인경을 울릴 수 있게 해달라는 국민들의 청원이 잇달았다. 미 군정청에서는 결국 이 청원을 받아들여 그 해 1231일 밤에 인경을 울리도록 허가하였다. 이 시는 그 소식을 듣고 쓴 작품으로 노래의 가사 형태로 만들어졌다. 해방의 종소리에 대한 뜨거운 감회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광(榮光)스러운 삼월(三月)한성일보(漢城日報)(1946. 3. 2)에 발표한 것으로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3.1절의 뜨거운 감회를 노래한 작품이다. 팔월(八月) 데모행렬(行列)에 부치는 노래현대일보(現代日報)(1946. 8. 16)에 발표했다. 이 작품은 그 뒤 제목을 바람에 불리는 수천 기빨은이라고 바꾸고 일부 구절을 고쳐서 시집 [새노래](1948)에 수록했다. 원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여기에 소개한다. 백만(百萬)의 편을 잃고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47. 8. 7)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시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선생이 19477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자 이를 추모하는 뜻으로 지은 작품이다. 여운형 선생은 조선인민당의 당수로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된 민족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통일(統一)에 부침신민일보(新民日報)(1948. 4. 18)에 발표한 작품이다. 남북한이 각각 서로 다른 이념적 지표를 내세우고 독자적인 정부를 만들고자 할 때 민족 통일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역설하고 있는 내용이다.

*****

울어라 인경아

1

문 열어주어라

인경이 울겠단다

벙어리사리 마흔 해

인제 사내나 다 목 노아 울라

(후렴)

울어라 인경아

네거리의 황혼을 찌르며

네가 울면 나도 울마

삼천만(三千萬)이 다 울자

2

창살을 뜨더 줘라

인경이 울겠단다

이 땅에 고인 피 상채기

고이 씨스며 쓰다듬으며

3

뭉치어라 엉키라고

인경이 울겠단다

놈들의 칼과 채찍

함께 겪은 마흔 해 잊지 말라고

4

새나라 오신다고

소리쳐 울겠단다

겹겹이 감긴 어둠

떨어버리고 몸부리치며

                             [신조선보(新朝鮮報), 1945. 12. 27]

 

영광(榮光)스러운 삼월(三月)

해 없는 나라 굿게 닷힌 겨울의 문() 어두운 육지(陸地)에 펴지는 빙하(氷河)에 깔려 다 식어가는 역사(歷史)의 하상(河上)에 그러허나 영광(榮光)스러운 삼월(三月) 구름 사이 새어 흐르는 간열힌 햇볏에도 생명(生命)과 샘과 싹은 화산(火山)처럼 솟아젓다

누가 막으랴 철이 돌아와 가꾸는 이 없어도 산()과 들 욱어저 피어 눈이 모자라는 진달래꼿을-

민족(民族)의 기억(記憶) 속에 높이 세운 기념비(記念碑) 우리들의 삼월(三月)에 해마다 감기우는 젊은이 마음 또한 꼿다발이니 푸른 하늘 우러러 피어오르는 지튼 피빗은 자유(自由)와 아름다움 죽음보다 사랑하야 열열함이라.

늙은이는 이윽고 모든 것 무덤에 파뭇어 잇어도 버리련만 이 땅이 널린 곳 해마다 뒤니어 피어나는 젊은 싹 녹여버리는 식은 하늘과 소낙비. 세계(世界)가 모이는 날 나라 없는 머리 추어들 곳 없어 일허버린 조국(祖國)은 목숨보다 비싸더라. 어버이와 자손(子孫)들 드되어 일어낫으니 조여드는 독사(毒蛇)의 허리 비틀어 뻐기며 라오곤보다 사나웁게 소리첫드라.

조상(祖上)적 남기신 여러 번 빗나는 사연과 용맹한 기록 가지가지 지니지 못하는 못난 자손(子孫)들 미운 굴욕(屈辱)의 역사(歷史) 지워버리려 상처 바든 민족(民族)의 노염 불길처럼 국토(國土)에 덥여

 

우리들의 삼월(三月)

하늘하늘 뻣히는

세기의 봉수불이었다.

창칼에 땅이 찍겨 다시 어두운 강산(江山)이 꼿가튼 피와 눈물에 젓어 감추어진 민족(民族)의 마음 하늘가에 이즈러진 무지개 걸리어 닥처오는 시간의 저편에 새나라 찻어 민족(民族)의 방랑(放浪)은 시작하였었다. 구름과 눈물 아롱져 빗나는 달 삼월(三月)을 안고 .....

젊은 삼월(三月) 아네모네곱게 타는 달은 우리들의 자랑 무지(無知)한 세기(世紀)의 암벽(岩壁)에 피로 쓴 아름다운 항의(抗議).

흐린 하늘과 어즈러운 밤과 사막(砂漠)에 울리던 태양(太陽)의 예언자(豫言者) 일어나라...... 웨치는 목쉰 소리었다.

인제 삼월(三月)은 꺼질 줄 모르는 횃불. 우리들의 압날 곤()하고 괴로운 먼 길 낙심(落心)과 회의(懷疑) 비겁(卑怯)의 그림자 일일이 살워버리는 거룩한 불길이어라.

                                                                                           [한성일보(漢城日報), 1946. 3. 2]

 

팔월(八月) 데모 행렬(行列)에 부치는 노래

 

바람에 떨리는 수천 기빨은

창공()에 쏘는 인민(人民)의 가지가지 호소(呼訴).

 

소리소리 웨치는 노래와 환호(歡呼)

구름에 사모치는 백성들의 횃불

타다타다 빛도 없는 팔월(八月)의 횃불

 

아스팔트 뒤흔들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발자곡의 조수는

어둔 밤 설레는 파도소리냐.

닥아오는 새날의 발울림이냐.

                                                         [현대일보(現代日報), 1946. 8. 16]

 

백만(百萬)의 편을 잃고

 

당신은 자동차(自動車)를 싫여하섯다.

자동차(自動車)보다는 뻐쓰를

뻐쓰보다는 몬지 낀 길바닥을 것기를 좋아하섯다.

거기 띠끌을 쓰고가는 우리들 곁에 늘 오시고 싶은 때문이었다.

 

당신의 곁에는 총()칼 찬 친위대(親衛隊)도 아모것도 없었다.

그런 것은 비겁(卑怯)한 팟쇼의 대장(大將)들의 짓이라 하섯다.

백성에게 자유(自由)가 없고 억울한 죽엄이 그들 앞에 나날이 딩굴 적에

호올로 안전(安全)한 곳에 당신은 도시 앉었을 수가 없었다.

쓸어질지라도 다만 괴로운 인민(人民)의 속에 있기가 소원이섯다.

 

당신은 언제고 젊은이들의 벗

가난한 이웃과 불상한 사람들의 친구

아이들과 공차고 달리기 좋아하는 진정한 스포츠맨이었다.

그러기에 당신과는 참말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얘기할 수 있었고

마음 놓고 정권(政權)도 미끼리라 했다.

 

언제고 군중(群衆)의 환호(歡呼) 속에 나타나던 당신

성낸 사자(獅子)처럼 단상(壇上)에서 노호(怒號)하실 적에도

우리는 서산(西山)을 처다보며 뻑뻑 담배를 빨 수가 있었다.

야단맛고 벌벌 떠는 것은 팟쇼의 대장(大將)들과 인민(人民)의 적()들이고

우리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시달리는 백성을 등에 돌리고 반동(反動) 앞에

당신이 가로막아 섰을 때

우리는 참말이지 신이 났었다.

그러기에 당신의 일홈과 함께 인민(人民)이 부르는 만세(萬歲) 소리는

가슴과 뱃장에서 아니 발톱에서 머리끝까지 울려나왔다.

당신은 벌써 당신 자신(自身)이 아니오

모든 인민(人民)의 당신이었다.

 

뚫어진 차()에 실려 소리없이 종로(鐘路)로 도라오실 적에

골목의 과일장수도 신기우려도 어멈도 여점원(女店員)

기구와 저울과 수판을 내던지고 엉엉 울었다.

기자(記者)는 연필을 팽개첫으며 늙은이와 소년(少年)

벽보(壁報) 앞에 그만 줏앉었다.

그들은 그들의 겻테서 백만(百萬)의 편을 한꺼번에 잃었던 것이다.

 

지금 전에 없이 사나운 반동(反動)의 회오리 속에서

아우성치는 인민(人民)의 곁에 아모리 도라보아야 당신이 안 계시다.

오늘은 웅변(雄辯) 대신에 무거운 침묵(沈默)으로써 가르키시는

승리(勝利)로 가는 싸움의 길이 만() 사람의 눈앞에 눈물에 어려 빛날 뿐

피로써 당신이 헤치신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의 길이

횃불처럼 별처럼 떨리고 있을 뿐.

-몽양(夢陽) 선생(先生)을 일코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47. 8. 7]

 

통일(統一)에 부침

 

우리는 본시 하나이었다.

뼈저린 챗직 아래서도 끌어안고 견디던 하나이었다.

소리소리 지르면 제절로 반항(反抗)의 합창(合唱)이던

눈물어린 망향(望鄕)의 쓴 잔도 함께 난운

! 둘을 모르는 하나이었다.

팃기 없는 하늘 아래

문의 놓은 기와와 그릇과 비단과 종종한 말

모두 아름다운 것

죽어지라 사랑하며 살아온 내력(來歷)도 하나.

 

인제 온 백성을 들어 구임(口臨) 문제(問題)의 막다른 골로 몰아넣어

형제(兄弟) 있는 곳과 소식 또 오래인 꿈

돌볼 새 없이 만드는

이 놀라운 실리주의(實利主義)의 천재(天才)에 우리 모두 항거(抗拒)하리라.

짓밟힌 아름다운 것 함께 뫃여 소곤소곤 살아갈 길 지키기 위하여

 

이방(異邦) 친구들에게 일르노니

한데 뭉친 민중(民衆)의 민주주의(民主主義) 대신에

쪼각난 폭군(暴君)의 민주주의(民主主義)

그대들에게 우리 언제 부탁한 기억(記憶)이 없다.

사월(四月)달 진달레 뿌리 벋어

말래도 굳이 벋어

남북(南北)으로 만발(滿發)한 산맥(山脈)과 핏줄

뚜드러져 굼뚤거리는 것

뉘 감히 끊을 것이냐?

 

흐르는 강물도 철로(鐵路)도 전선(電線)도 변하는 계절(季節)

오로지 한 소리 아래 움지기고 시퍼

모든 시내 강물 바다로 뫃이듯

진달레 개나리 욱어져 피는 한 보금자리로

우리 모두 한데 엉키어 논이지 말자.

 

틀어쥔 손과 손 악수(握手)가 아니라

()과 북()의 자국도 없는 용접(鎔接)

모든 열역학(熱力學)의 법칙(法則)을 기우려

거만한 이방(異邦) 사람들의 눈앞에서

보아지라 우리 모두 감아매리.

                                                     [신민일보(新民日報) 1948.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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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만남 그리고 헤어짐

- 고 김윤식 교수님을 생각하며

 

1

 

내가 김윤식 교수를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서울대 문리과대학이 종합화 계획에 따라 관악 캠퍼스로 이전한 뒤의 일이다. 벌써 40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대학원을 마친 후 병역의무를 끝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국문학과의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다른 대학에 시간강사를 맡아 하루 출강하는 일을 빼고는 매일 학과 사무실에 나가서 여러 가지 사무를 처리해야만 하였다. 그 무렵부터 나는 문단의 말석에 끼어 잡지에 월평을 겨우 쓰기 시작하였다. 문리대 시절과 달리 관악 캠퍼스에서는 서울대학교 교양학부 국어과가 문리과대학 국문학과로 통합되면서 인문대학 국문학과가 되었기 때문에 교수님들도 많았고 학과 사무실은 한가한 날이 없었다. 더구나 유신독재 체제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로 캠퍼스가 늘 어수선했다.

어느 날 오전이었다. 학과 사무실의 내 책상 위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내가 전화기를 들자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김윤식이오. 내 방에 와서 차 한잔 하고 가소.’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사무실에서 보조로 일하던 아르바이트 학생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내게 말했다. 4층 복도에서 김윤식 교수님을 만났는데 권 선생 나와 있느냐고 물으셨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나는 김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교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창문턱에 놓은 컵 하나를 집어서 내게 건네며 결명자 끓인 물을 따라 주었다.

앉소.’

나는 의자를 끌어내어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김 교수는 읽던 책을 덮어두고는 앞뒤도 없이 이렇게 물었다.

그래, 권형은 앞으로 계속 평론도 쓸 생각이오?’

나는 무어라고 대답도 못하고 엉거주춤했다. 그랬더니 다시 이렇게 말씀을 했다.

평론이라는 게 그리 간단치 않은데...... 그렇게 힘들여 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내가 ?’ 하면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으니 김 교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권형이 쓴 월평 보았어요. 그런데 소설 월평이라는 것은 그렇게 힘들여 쓰면 아무도 안 봐요. 월평이라는 것은 작가에게 한 마디 말을 걸어보는 거지요. 말을 한번 슬쩍 걸어보면 그만입니다. 작가는 그걸 봅니다. 자기에게 비평가가 말을 걸어오니까. 그런데 권형은 너무 정직하게 머리로 짜내어 그 짧은 글에서 논리를 세워보려고 애를 쓰더구만. 작가는 자기 소설에 대해서는 조물주이지요. 자기가 만든 소설이라는 작은 세계를 완벽하게 장악하니까. 우리 작가들의 단수가 아주 높아요. 그러니 남의 말에 콧방귀도 안 뀌지요.’

나는 이게 무슨 말씀인지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뜨거운 결명자 차를 마시기만 했다.

문단에 친구가 많소?’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 말씀을 이었다.

우리 작가들은 모두 똑똑하고 제 잘난 맛에 살지요. 영리하기가 어떤 경우에는 교활하다고 할 정도지요. 세상에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경험도 많고 말솜씨도 좋고 술도 잘 마시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머리로 싸우는 것은 바보입니다. 그러니까 월평에서 작품을 언급하는 것은 한 마디 작가에게 말걸기를 해 보는 정도여야 적당해요. 한 마디 툭 던지면 됩니다. 그러면 작가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다 눈치를 채지요.’

나는 월평의 방법에 대한 김 교수의 설명에 놀랐지만 내 서툰 글이 더 부끄러웠다.

권형, 차좀 더 드릴까?’ 하면서 김 교수는 이렇게 말씀을 맺었다.

그냥 반가워서 하는 소립니다. 우리 국문과는 문학연구를 중시하니까 문단비평을 모두 우습게 여기지요. 그런데 권형이 잡지에 글을 쓰니 너무 반가웠어요. 나도 십여 년 전에 권형처럼 월평을 시작했을 때 꼼꼼하게 읽고 분석하고 따지면서.... 그런데 일반 독자들은 거의 그렇게 쓴 월평을 안 읽어요. 그래서 방법을 바꾸었지요.’

나는 지금도 그 첫 만남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김윤식 교수의 월평은 그 특유의 작가에게 말 걸기로 유명하다. 작가들과 맞서서 작가들을 긴장시킨다. 자기네 글을 꿰뚫어 보는 눈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언제나 문단의 현장에서 글쓰기의 감각을 유지해온 비평가는 김윤식 교수밖에 없다.

 

2

 

내가 서울대학교 전임교수가 된 것은 1981년이다. 나이 서른셋이었다. 국문학과는 물론이고 인문대학 전체에서도 연치가 가장 낮았다. 나는 늘 긴장하고 살았다. 나를 대학 입학시절부터 가르치신 선생님들이 많았으니 당연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김윤식 교수는 강의가 있는 날에만 주로 학교에 나왔다. 학과의 교수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학과 운영에 대한 의견을 내는 적도 없었다. 모든 일은 학과장에게 위임하고 가끔 궁금한 일이 생기면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권형, 여기 오소. 차 한 잔 마시고 가소.’ 이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나는 한 번도 다른 일을 핑계대지 않았다. 김 교수의 연구실은 온통 사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작은 책상에 늘 원고지를 펼쳐두고 책을 읽고 있었다. 연구실에는 소파도 없었고 나무 걸상 두어 개가 있을 뿐이었다.

김윤식 교수가 반드시 참가하는 학과의 행사는 석사 박사 학위논문 예비 발표회였다. 대학원 과정에서 일년에 두 차례씩 봄과 가을에 치르는 논문발표회는 엄숙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모두가 긴장해 있었다. 학과의 모든 전공 교수가 나와 앉아 있는 자리인데다가 대학원 과정을 이수중인 학생들은 모두 참관해야만 하였다. 학위 과정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이 연구한 과제의 결과를 처음으로 바깥에 소개하게 되니 발표자들은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할 정도였다. 발표자에게는 석사 논문의 경우 30분 정도 발표 시간이 주어진다. 박사 논문인 경우는 45분 정도로 길게 발표를 해야 했다. 발표가 끝나면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질의와 강평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도교수가 논문 준비 과정에서 생겼던 일도 소개하고 논문의 주안점도 보충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이 논문 예비 발표에서 발표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교수들의 질문과 강평이었는데, 특히 김윤식 교수를 무서워하였다. 김 교수가 발표 논문에 대해 어떤 부분을 지적하면서 질문을 하는 경우는 그 논문이 비교적 잘 준비되었을 때였다. 김 교수는 어떤 부분을 왜 그렇게 설명했는지도 묻고 또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서양의 어떤 이론서를 들면서 그 책을 읽었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런 질문을 받는 발표자는 안도해도 좋았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하지 않고 김 교수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다그치기도 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이야기를 지금 어디서 늘어놓고 있느냐?’ ‘이렇게 자기 글에 자신이 없는데 무슨 공부를 한다고 나대느냐?’ ‘당장 집어치워라.’ 하고 불호령을 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호되게 야단을 치고 김 교수는 늘 학문하는 자세를 강조했고, 학문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내세웠다. 그 자리에서 야단을 맞은 학생들은 그날 밤 자기들끼리 모이는 뒤풀이에서 폭음을 하며 괴로워했다는 이야기도 나는 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김 교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 엄정하신 분이 발표회에서 야단을 친 학생을 그대로 물리치지 않고 다시 연구실로 불러 논문의 문제점을 소상하게 지적해 주었고, 당신이 보던 책을 꺼내어 주고는 한번 자세히 읽어보라고 건네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도 있다. 학위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은 김 교수의 이 투박하면서 때로는 자상한 가르침에 커다란 감화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 논문의 내용에 대해 김윤식 교수가 질문을 해왔다는 사실을 늘 자랑처럼 기억하려 하였다.

 

3

 

김윤식 교수가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고 자가용차를 몰고 학교로 출근한 것은 한동안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 사이에서도 화제거리였다.

어느 날 오후였다. 김 교수가 예의 그 낮은 목소리로 오소. 차 한 잔 하고 가소.’하며 전화를 하였다. 내가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방안에 결명자 끓이는 냄새가 가득했다.

여기.’

김 교수는 내게 결명자 차를 한 컵 따라준다.

이게 눈에 좋다네요. 눈을 맑게 한다구 권해서.’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잣말처럼 눈은 평생 잘 간수하고 사용해야 하니까.’ 하면서 결명자 차를 마셨다. 그리고는 그날 아침 출근길에 일어났던 황당한 자동차 사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에 내 차가 운전 중에 고장을 일으켰어요.’

나는 깜짝 놀라서 어디 다치신 곳을 없느냐고 물었고 차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김 교수는 , ...’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서는 아무 일이 없이 잘 나왔어요. 큰길로 나섰는데 오늘은 차들이 많아서 한강다리로 들어서는 데 꽤 시간이 걸렸지요. 막 다리 위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차가 이상해집디다. 앞 유리창에 검정 막대기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데 도통 멈추지를 않아요. 나는 놀라서 다리를 다 건너와서는 길가에 차를 세웠지요. 그리고 시동을 끄니까 그 막대기가 턱하니 유리창 위에 걸터 올라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나는 무슨 말씀인지 대충 짐작을 했지만 뒷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공중전화로 보험회사에 연락을 했어요. 당장 와서 차를 손봐달라고. 거의 40분 정도가 지나서 보험회사가 보낸 수리기사가 차를 몰고 나타났어요. 무슨 고장이냐고 물어서 내가 설명을 했더니 시동을 한 번 걸더군요. 그리고 무언가를 손댄 것 같은데 그 유리창 위의 막대기가 두어번 움직이다가 멎어버리는 겁니다. 수리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자동차의 본넷을 들어 올려 보고는 이내 쿵 하고 내리닫아요. 그리고는 다 고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지요. 정말 아무 문제없느냐고. 기사는 젊은 녀석인데 픽 한번 웃고는 날 보고 운전 조심하라면서 돌아갑디다.’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차 앞유리창의 와이퍼에 대해 내가 설명을 하니 권형이 차에 대해서도 잘 아시네.’ 하고 웃었다. 그 뒤 김 교수는 차를 오랫동안 몰고 다니지는 않았다. 가끔 학교에 나오는 경우에도 택시를 이용하거나 사모님이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아무래도 두 다리로 걷는 것이 편해요.’ 하시는 것이었다.

 

4

 

국문학과에서는 해마다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로 학술답사를 떠난다. 여간해서 그런 행사에 나서지 않던 김윤식 교수가 충청도 진천 조명희의 고향과 아산 이기영의 고향을 찾아 가는 답사에 참여했다. 내가 답사반 지도교수로 인솔 책임자가 되었는데, 학부생들도 몇 명이 자발적으로 답사에 참가했다.

진천 벽암리에서 조명희와 조벽암의 친지들을 만나고 생가터를 돌아보는 동안 김윤식 교수는 대학원생들에게 조명희의 소련에서의 죽음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모두가 점심을 먹은 뒤 읍내 시장 옆의 빈터에 세워둔 버스 있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김 교수는 언제나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았지만 아무도 그 곁에 동석하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김 교수를 어려워하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버스에 올라탔는데 키가 작은 학부 여학생 하나가 맨 마지막으로 골목어구의 상점에서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들고 달려왔다. 나는 김 교수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여학생이 차에 오르자 갑자기 앞자리의 김 교수가 여학생을 손으로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그거 나 하나 주소.’ 하는 것이었다. 여학생이 멈칫하다가는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김 교수에게 드린다. 김 교수는 뜻밖에도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는 그 여학생에게 옆 자리에 앉도록 권하는 것이다. 그 학생이 뒤쪽으로 가겠다고 하였지만 나도 눈짓으로 그냥 그 자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김 교수가 그 학생을 곁에 앉게 한 후 주고받는 대화를 나는 유심히 엿들었다

이게 그렇게 맛이 있나?’

예 엄청 시원하고 맛있어요. 제가 봉지를 뜯어드릴까요?’

아니야 내가 뜯지.’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은 대화가 끊겼다. 버스가 다음 행선지를 향해 출발을 했다.

김 교수가 학생에게 묻는 말이 들렸다.

거기 무어가 들었나?’

학생이 한쪽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손지갑이었다. 학생은 학생증, 주민등록증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 교수가 그 지갑을 이리 달라고 한다. 학생이 별거 없는데요 하면서 지갑을 펼쳤다. 천원짜리 몇 장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뒷자리의 내 눈에도 들어 왔다. 김 교수가 그 지갑을 받아 들더니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돈 만원짜리 두 장이었다. 김 교수는 그 돈을 학생의 천원 짜리 몇 장 사이에 끼워 넣고는 지갑을 학생에게 돌려준다.

학생이 놀라면서 말을 못하고 있자 김 교수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이스크림 값을 주는 거야. 그냥 받아두어.’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5

 

김윤식 교수가 서울대학교를 퇴임하던 해였다. 곧 연구실을 치우겠다며 내게 전화를 하였다. 그날 나는 김 교수와 함께 교수식당에서 점심을 하고는 같이 교정을 걸었다. 김 교수는 생전 묻지 않는 이야기들을 내게 물었다. 아이들 잘 공부하고 있느냐, 마나님(내 아내)은 건강하냐, 고향인 충청도에는 자주 내려가느냐, 등등.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려드렸다. 이야기 끝마다 아 그렇구만.’ 하면서 김 교수는 내 이야기를 받았다.

나도 김 교수께 퇴임 후 어떻게 소일하시겠냐고 물었다. 김 교수는 고개를 들어 관악의 정상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요즘 아주 운동을 많이 합니다. 같이 산에 오르던 출판사 사장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산에 가는 것은 끝내고 요새는 한강변을 걷지요. 매일 두어 시간은 족히 걷는데 아주 기분이 좋아요. 내 몸 간수는 철저히 하려고. 우리집 할망구가 건강이 좋지 않으니 내가 돌보아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걷지요.’

나는 한강변 산책이 아주 좋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이제는 좀 쉬어가면서 글을 쓰시라고 권했다. 뒷사람들도 좀 할 일을 남겨두시라고. 김 교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도서관 뒷길을 돌아 버들골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학생회관의 식당 구석에 차려놓은 커피숍에 들렀다.

이 집 커피가 그래도 맛이 있어.’

김 교수는 커피잔을 들고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는 내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좋은 학교에서 똑똑한 학생들과 평생을 살았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읽고 싶은 책을 다 읽고, 쓰고 싶은 글을 다 썼다고 생각해요......하지만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권형은 그런 거 못 느끼시오? 여기 관악의 우리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 이제 그만 두려니까 이 자리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성격이 못되어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평생을 집에서 학교만 왔다갔다 했는데...... 그래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받아주고 나를 인정해준 곳은 이곳 학교뿐이요...... 나는 작가들과 맞서려고 참 품을 많이 팔았는데...... 내가 쓴 글은 모두 발로 쓴 것이지요.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뒤졌으니..... 요즘 학생들은 너무 똑똑해서...... 아무도 이런 공부는 안 하려고 하니 걱정이요.’

나는 이런 말씀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제 학계의 후배들이 그리고 제자들이 모두 자기네 몫을 다하고 있으니 걱정마시라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그저 앞으로 건강 잘 챙기셔야 한다고만 했을 뿐이다.

 

6

 

김 윤식 교수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후학들을 언제나 겁먹게 만들었던 어른이 가셨다.

문단 한복판에 서 계시던 평론가, 글을 읽고 쓰는 자세에 대해 늘 고심하던 큰 학자, 그리고 우리들 모두에게 선생님이셨던 김윤식 교수님을 다시는 뵐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식의 회고담을 선생님의 영전에 올려야 한다는 것도 나는 가슴이 아프다. 우리 문단에 이렇게 열정적인 비평가가 없었는데 앞으로 김윤식 교수님과 같은 문학연구가를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떠나신 자리가 더욱 허전하게 느껴질 뿐이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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