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향이 남긴 시조 한 수

1

옛날 잡지들을 넘기다가 우연히 찾은 것이 나도향(1902-1926)이 남긴 시조 한 수다. 나도향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거니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시조 한 수를 남겼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시조의 제목은 버들이다.

보다가 말하다가
그래도 모자라서
서창 앞 버들가지
내 맘 매어 두고 왔소
바람에 창 두들기거든
내 맘 여겨

 

내 맘을 말로 못하고
버들피리 혀를 내어
허공 중천에
힘껏 내어 불었더니
피리도 제 가슴 타는지
우는 듯 우는 듯

 

봄 정에 애타는 맘
버들야 알듯한데
길길이 늘어져
못에 시쳐 끊어져도
나의 맘 그의 맘을
얽어 놀 줄 왜 모르니

 

이 시조는 나도향이 죽은 뒤에 그를 회고하는 김억의 나도향 군의 유고에(현대평론, 1927. 8)라는 글 속에 포함되어 있다. 김억은 당시 가면(假面)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던 중이었다. 그는 나도향에게 단편소설을 한 편 쓰도록 청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부탁한 소설 대신에 시조 한 수를 보내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김억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때 내가 단편소설을 하나 써달랜 것이 소설을 써 보내지 아니하고 시조를 보내면서 천하일품의 시조를 보내니 광영으로 알고 실어 주게하는 편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천하일품이면 다른 곳에 팔아서 술잔거리나 삼고 내게는 다시 단편을 써 주게하는 답장을 보내고 다른 원고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와야 할 원고는 오지 아니하고 기일은 넘어가 버려 그대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 향기롭지 못한 이름이라 할 유고두 글자를 붙여가지고 발표되리라고야 나는 물론이요 나 군 역시 뜻밖이었을 것이니 사람의 일이란 참말 모를 것이다.

나도향이 유작으로 남긴 시조 한 수는 그가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사랑의 절절한 심정을 가슴에 품고 살았음을 보여준다. 나도향이 이 작품을 쓴 시기는 1920년대 중반 문단의 관심사가 되었던 시조부흥운동과 서로 겹쳐 있다. 시조부흥운동은 전통적 문학 형식이었던 시조를 현대적으로 다시 창작하자는 데에 그 목표를 둔 것이다. 최남선을 위시하여 이병기, 이은상 등에 의해 주도된 시조부흥운동은 시조시학의 성립을 촉진하게 되었으며, 시조의 전아한 기풍과 새로운 시대정신의 결합을 시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최남선의 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1926)라는 글은 시조 부흥에 대한 그의 신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서 국민문학이라는 용어 자체의 출현을 낳기도 했다. 그가 펴낸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1926)는 시조부흥운동의 실천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도향의 시조는 이와 같은 당대의 문단적 분위기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이상의 변화나 발전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작품이 그대로 그의 유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2

나도향의 본명은 경손(慶孫)이다. 대대로 의약을 업으로 삼는 집안에서 13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종화가 쓴 도향 나빈 소전(신민, 1926. 9)을 보면 그의 조부는 서울 장안에서 이름난 한방의 명의였고 그의 부친 또한 의사였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그는 조부와 부친의 권유에 따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의학 공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결국 일년 만에 학교를 중퇴하였다. 그는 집안 어른들의 뜻과는 달리 혼자서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그렇게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누구도 그의 행동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도쿄에서 공부할 수 있는 학비를 전혀 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일본 생활을 접고 귀국한 후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가족과 관계를 끊어버렸다.

나도향의 문학적 글쓰기는 집안 어른들에 대한 반항으로 시작되었고, 가출 소년으로서 겪어야 했던 가난과 방랑 속에서 발전하였다. 그가 문단에 이름을 제대로 알린 것은 1922년 박종화, 홍사용, 이상화, 현진건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백조동인으로 참가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동인지의 창간호에 그는 단편소설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했고 잇달아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을 내놓으면서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나도향은 스무 살의 나이에 장편소설 환희(幻戱)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이 작품은 나도향의 첫 장편소설일 뿐만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1917) 이후 신문에 연재된 첫 번째의 창작소설이라는 점에 문단의 관심을 모았다. 더구나 이 작품을 탈고한 것이 나도향의 나이 열아홉 때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자들을 놀라게 했거니와 그 작가적 천품에 모두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을 향한 개인적 열정을 실현하기 위해 문학에 뛰어든 이 소년 문사를 놓고 시인 홍사용은 오랑캐꽃내 같은 그의 작품은 돌개바람같이 창작계를 풍미했다고 적었다. 나도향은 환희의 연재에 앞서 이 소설이 남에게 내놓기 부끄러울 만치 푸른 기운이 들고 풋내가 난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푸른 기운이 돌고 상긋한 풋내가 나는 것으로 도리혀 성과의 예감을 깨닫게 된다고 자부했다. 그의 절친이었던 박종화는 이 소설이 청춘남녀의 연내의 갈등을 그린 것이나 낭만적 경향이 농후하다고 평하면서 좀더 높은 곳에 올라앉아 이 주인공들의 장난을 본다면 한 마당 환희와 같다고 회고했다.

3

장편소설 환희의 중심인물로는 서울 갑부 이상국의 배다른 남매가 등장한다. 은행 직원 이영철과 여학교에 다니고 있는 혜숙이라는 젊은이다. 소설의 이야기 속에서 두 남매가 각각 추구하는 낭만적 사랑과 참된 행복이라는 주제는 당대의 현실로 본다면 개인의 자기 각성이라는 계몽적 담론과도 이어진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들의 열정을 그대로 용납하지 않은 채 두 남매가 애욕의 문제에 얽혀 고뇌 속에서 좌절하고 파멸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런데 환희의 여주인공 혜숙이 물질적 욕망에 빠져들어 자기 사랑을 배반하게 되는 모티프는 이미 신파소설 장한몽을 통해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와 흡사하다. 이 소설에서 독자들을 관심을 모았던 영철과 기생 설화의 연애는 자기모순을 헤쳐 나가기 위해 고뇌에 휩싸여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 낭만적 연애는 무정에서 기생 박영채가 화류계를 벗어나게 되는 계몽적 서사구성의 허구성에 대응하고자 하는 작가적 의욕을 보여준다. 연애의 기쁨도 사랑의 고통도 이 소설 속의 젊은이들에게는 모두 자신들의 몫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도향은 환희의 연재가 끝나자 장안의 스타가 되었지만 엄격한 조부는 끝내 그의 문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1925년 단편소설 물레방아, , 벙어리 삼룡등을 통해 보다 완숙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뒤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하지만 가난한 그를 맞아줄 수 있는 어떤 자리도 도쿄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1926년 병객의 몸이 되어 돌아온 그는 끝내 가족의 곁으로 가지 못한 채 스물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박종화는 , 박행한 천재여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 나도향의 죽음은 초창기 문단이 처음으로 쓰는 가장 가슴 아픈 애사(哀詞)가 되었다. 나도향의 시조 버들은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써놓은 아픈 사랑의 노래처럼 들린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수영의 자유

문학칼럼 2020. 7. 31. 19:45 |

김수영과 노고지리와 자유

 

김수영(1921-1968)은 현실 참여 문제를 시와 행동을 통해 실천적으로 보여준 시인이다. 그는 전후시단에서 추구했던 시적 작업을 시집 󰡔달나라의 장난󰡕(1959)을 통해 정리한 뒤에 자신의 시적 지향에 대한 전환을 시도하게 된다. 전후 시단에서 후기 모더니즘 운동의 영향을 받고 활동해 온 그는 바로 그 모더니즘이 빠져든 추상성을 벗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실험성과 서정성의 특이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그가 다시 발견한 것은 개인의 삶과 현실 그 자체의 중요성이다.

김수영은 1960년대 중반부터 시의 현실 참여 문제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면서 시여 침을 뱉어라(1968)를 비롯한 일련의 산문으로 자신의 시적 입장을 천명한 바 있다. 그가 강조한 시의 현실 참여 문제는 자유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한국문화의 다양성과 활력을 깨치는 무서운 폭력을 정치적 자유의 결여라고 규정하고 있다. 자유의 참뜻을 4월 혁명을 통해 현실적으로 체득했던 그는 그 혁명이 군사정권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보면서 짙은 회의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가 내뱉은 야유와 욕설과 악담은 혁명의 좌절을 초래한 소시민들의 소극성을 겨냥한 것이지만, 사실은 자기 풍자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김수영의 반시론(1968)은 이러한 자기 풍자의 극단적인 산문적 진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애를 써서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책을 안 읽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책이 선두가 아니다. 작품이 선두다. 시라는 선취자가 없으면, 그 뒤의 사색의 행렬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고생을 하든지 간에 시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책이 그 뒤의 정리를 하고 나의 시의 위치를 선사해 준다. 정신에 여유가 생기면, 정신이 살이 찌면 목의 심줄에 경화증이 생긴다.

이런 때는 고생이란 고생을 다 써 먹었을 때다 말하자면 수단으로서의 고생을 다 써먹었을 때다. 하는 수 없이 경화증에 걸린 채로 시를 썼다. 배부른 시다. 그것이 라디오라는 작품이었다. 그후 먼지, , 美人등의 3편을 썼는데, 아직도 경화증은 풀리지 않고 있다. 만성 경화증인 모양이다. 이대로 나가면 부르좌의 손색없는 시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전에는 무엇을 쓸 때 옆에서 식구들이 누구든지 부스럭거리기만 해도 신경질을 부렸는데, 요즘은 그다지 마음에 걸리지도 않고, 오히려 훼방을 좀 놀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것이 약이 되고, 작품에 뜻하지 않는 구명대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잡음은 인간적이다. 그것은 너그러운 폭을 준다. 잘못하면 몰살을 당할 우려가 있지만, 잡음에 몰살을 당할 만한 시는 낳지 않아도 후회가 안 될것 같다.

                                                                                                               반시론

반시론에서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문제는 시를 진정으로 시답게 생각하는 김수영의 시적 태도이다. 시를 시답게 생각한다는 것은, 시를 시 이상의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시가 포괄할 수 있는 삶의 의미와 그 속성을 시를 떠나서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도 통한다. 그러기에 그는 시라는 것이 말로 씌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동시에 온 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시론은 지극히 사적인 자기 고백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속에 시 쓰기의 방법과 그 정신에 대한 분명한 지향을 보여준다. 김수영이 지적하고 있듯이 정신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 삶에 대한 안이한 태도와 연결되고, 결국 목의 심줄에 경화증을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는 오히려 그 정신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자극할 수 있는 시정신의 새로움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적인 삶에 길들여지고 습관에 주저앉을 때 인간의 정신활동은 정지되고, 모든 문화는 그 발전과 변화를 중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물질적인 삶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습관성에의 함몰은, 인간의 비인간화를 유도하는 결정적인 요건이 됨은 물론이다. 자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의 상실이 정신의 여유에서 기인된다는 사실은, 확실히 현실적인 문학의 풍토에서 다시한번 음미해야할 문제인 것이다. 더구나 잡음(雜音)’의 현실과 그 잡음을 감당할 수 있는 시의 의미는 일상의 현실 속에 서 있는 시인의 태도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

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은 자유의 개념을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뒤 동아일보(1960. 7. 7)에 발표된 것으로 시선집 󰡔거대한 뿌리󰡕(민음사, 1974)에 수록되어 있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
왜 고독(孤獨)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이 시는 전체 텍스트가 3연으로 구분되어 있다. 하늘 높이 치솟아 날아오르는 노고지리의 모습과 함께 자유, 혁명, 고독, 피 등의 관념적 시어가 등장한다. 시의 텍스트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노고지리다. 종다리라고 부르는 이 새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번식하는 텃새이다. 그런데 봄철 번식기가 되면 종다리의 수컷은 하늘로 치솟아 날아올라서는 공중에서 날개를 심하게 퍼덕이며 소리내어 지저귀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그 울음소리가 멀리까지 퍼진다. 보리가 파랗게 자라나는 봄날 고향 시골에서 많이 들었던 소리다. 암컷을 부르기 위한 소리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보다는 하늘로 올라서 자기 영토를 표시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이란다.

시의 1연에서 화자는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 부러워하던 /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라고 진술하고 있다. 종다리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두고 어느 시인이 그 자유로움이 부러웠다고 노래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화자는 그렇게 말한 시인의 말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푸른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노고지리의 자유로운 모습이 부러웠다는 말을 시적 화자는 수긍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이 시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의 텍스트의 진술을 놓고 본다면 화자가 수정하고자 하는 것은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는 내용이다. 노고지리가 봄날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모습은 그 자체가 하늘을 제압하는 듯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화자의 생각으로는 노고지리에게 그것이 자유로움이 아니다. 노고지리는 멀리 암컷을 불러야 하고 자기가 터잡고 있는 영역을 지켜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무한의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노고지리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존을 위해 가장 힘든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시적 화자가 왜 어느 시인의 말을 수정해야 한다고 진술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2연은 전체 10행으로 이어져 있는데 시행의 배열 자체가 도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유를 위해서 /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 사람이면 알지라는 구절은 뒤로 이어지는 시적 진술 내용 전체를 목적어로 삼고 있다. 여기서 자유를 위해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란 자유를 쟁취하고 그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투쟁하며 고뇌해본 사람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러므로 비상은 정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행동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자유를 위한 적극적인 자기 투여를 비상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 이 시를 발표할 무렵의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는 4월 학생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약 두 달 전도가 지난 뒤에 발표된 것이다. 모두가 4월 혁명의 성공에 고무되어 있던 시기에 시인은 혁명을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과 자세를 촉구하고 있었던 셈이다.

노고지리가 공중에 떠서 노래하고 있는 것은 자유로움에 대한 찬탄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를 요구하고 지켜 나가기 위한 절규에 해당한다. 거기에는 환희가 아니라 고통이 수반된다.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다는 것은 자유를 거저 얻어낼 수 없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투쟁과 피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를 지켜나기 위해서도 피나는 노력이 요청된다. 혁명이 고독하는 말은 혁명에 수반되어야 할 철저한 자기 인식과 올곧은 자세와 연결된다. 혁명을 위해서는 좌우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앞뒤를 고려해서도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어렵다. 철저하게 과거와 단절하고 엄격하게 현실적 관계로부터 탈피해야만 된다. 그러므로 혁명은 외로운 결단일 수밖에 없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동아일보 창간 100년 그리고 문화주의

창천(蒼天)에 태양이 빛나고 대지에 청풍이 불도다.’ 동아일보의 창간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아일보는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내세우면서 첫째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 둘째 민주주의 지지, 셋째 문화주의 제창이라는 3대 주지(主旨)로서 그 창간의 의의를 선포한다. 이 세 가지 목표 가운데 유별난 것이 바로 문화주의다.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 내용을 충실히 하며 풍부히 함이니 곧 부()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과 도덕의 순수와 종교의 풍성과 과학의 발달과 철학 예술의 심원오묘(深遠奧妙).’

동아일보가 내세운 문화주의100년 전의 창간 당시를 돌아보면 그 자체가 낯설다. 문화주의라는 말은 동아일보 이전의 국내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용어다. 문화라는 말조차도 대중 독자들에게는 그리 친숙하지 않았던 시대가 아닌가? ‘주의(主義)’라는 말이 붙어 있는 문화주의라는 합성어에는 그 지시 영역과 의미의 범주화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미묘한 힘이 담겨 있다. 문화주의는 지식과 교양이라는 문화의 보편적 의미 영역에서 그 관념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실천적 의지를 포함한다. 그리고 동시에 실질적이면서 구체적인 민족의 삶의 모든 활동 영역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괄하고자 하는 의욕을 드러낸다. 이 엄청난 구상이야말로 동아일보의 새로운 탄생에서 문화주의의 제창을 다시 주목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동아일보의 문화주의에는 민족을 그 주체로 내세울 수 없었던 식민지 현실의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여기서 문화주의는 문화통치를 표방했던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대한 표면적 수용과 정신적 저항이라는 양가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화주의라는 말이 겉으로 드러내는 보편적 가치 지향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민족의 문화또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위장되어 있다. 문화는 그 형성의 주체가 되는 민족의 삶과 현실을 떠나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동아일보는 창간과 함께 일제의 강압적 언론 규제를 견디어내야 했고 정치 사회적 이념의 균형 문제로 상당한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 내세운 문화주의의 주지를 끝까지 지켜낸다. 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에서 드러나는 대중적 수용의 익명성은 신문사 자체가 주관하는 다채로운 행사를 통해 조화롭게 포용한다. 그리고 문화의 넓은 영역 안에서 언론의 민주주의적 가치와 상업주의적 요구의 이질적 충돌까지도 신문지면 배분의 균형과 형평성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동아일보는 민족의 삶의 방식과 그 내용을 내적으로 형성하는 정신적 실체의 규명에 언제나 앞장서 왔다. 민족 전체의 삶에서 드러나는 중요 관심사와 그 실질적 가치를 사회 각 방면의 제도와 활동을 통해 확인 취재하고 이를 널리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문화의 영역과 그 위계가 상상적으로 구획되면서 정치, 국제관계, 경제, 지역사회 등에서 일어나는 숱한 사건들이 신문지면 위에 분할 배치된다. 고급한 예술의 모든 양식은 물론 개인적인 지적 탐구활동까지도 여기에 포함되었고, 사소한 일상도 문화적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내용을 신문지면 위에 가시적으로 펼쳐놓기 시작한다. 더구나 국내의 각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지구 반대쪽의 외국 사정과 함께 같은 지면 위에 소개되면서 그 삶의 모습이 새롭게 조명된다. 이 같은 삶의 동시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동아일보가 주창하고 있는 문화주의의 가치를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의 지면을 넘겨보면, 창간 1주년에 단군(檀君)의 영정을 공모하고 백두산 천지(天池)를 신문지면 위로 옮겨놓고 있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근원을 밝히고 동아(東亞) 문명의 출발점을 알리기 위한 일이다. 동아일보는 인도의 시성(詩聖)으로 칭송되었던 타고르의 입을 통해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 시기에 / 빛나던 등촉 하나인 조선 /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라고 노래 부르게 한다. 일본 지식인으로 미술비평의 권위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일본의 칼날이 아니라 한국은 그 예술의 미로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거니와 지배자인 일본인의 눈을 통해 한국 전통예술의 미()적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도록 한 것도 동아일보다. 식민지 지배 상황 속에서 이보다 더 가슴 벅찬 민족 문화의 표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동아일보는 신문사 자체의 사회계몽 사업으로 문자보급운동을 선도했다.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언문 표기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조선어 교육의 축소 제한 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 동아일보였다. 그리고 스스로 한글강습을 주도하면서 민족의 교육과 지식 정보의 대중적 보급을 직접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 특이한 민족어 운동은 일본어를 국어라고 강요했던 식민지 문화정책에 동아일보가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지배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의 공식화에 맞선 피식민지 민족어의 생존 투쟁이라고 할 만하다. 동아일보가 지향하는 문화주의의 탈식민적 성격이 여기서 드러나고 있다.

동아일보는 문화주의의 주지 아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스포츠를 문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각종 스프츠 대회를 주최하고 후원하면서 체육과 보건이 민족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주지시켰고 민간 중심의 체육회 결성을 주도하면서 한국 민족의 우수성을 스포츠를 통해 강조한다.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安昌男)이 일본에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우고 조종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안창남 고국 비행을 위해 모금을 주도한 것도 동아일보다. 안창남이 민족의 성금으로 마련한 비행기 금강호(金剛號)를 타고 서울 상공을 왕복 비행하던 모습은 동아일보 지면에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한국의 아들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1위로 결승선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신문의 첫 머리에 그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올렸던 것도 동아일보다. 이 유명한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폐간의 위기에까지 몰렸지만 동아일보는 민족의 열정과 울분을 그렇게 대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사회생활에서 소외되었던 여성을 신문의 지면 위로 끌어내고 그 역할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놓았다. ‘안살림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져 있었던 육아, 요리, 복식 등의 가정생활을 신문의 기삿거리로 만들어 사회문화적 관심사로 키워낸다. 어린이를 위한 지면을 별도로 만들고 청소년의 참여를 위해 투고를 장려한다. 낡은 것으로 버려진 채 민간에만 전해졌던 전래의 연희를 전통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신문의 지면 위에 올려놓은 것도 동아일보다. 민족문화의 저력이 민속과 전통 연희의 그 오랜 역사 속에 살아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한유(閑遊)의 여기(餘技)에 불과했던 바둑을 지적(知的) 스포츠의 하나로 승격시켜 신문지면에 바둑판을 깔아놓은 것도 동아일보가 아닌가?

동아일보는 신문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대중매체의 보도 기능을 확대하기 위해 문화적 융합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업 확장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신문사 안에 별도의 조직으로 출판국을 설치하고 <신동아>, <신가정> 등의 잡지를 출간함으로써 신문사의 이른바 자매지 시대를 열어놓은 셈이다. 해방 이후에는 방송이라는 새로운 영역에도 진출한다. 신문과 출판의 결합에 이어 방송과의 연결을 통해 매체와 제도의 변혁과 융합을 선도하게 된 것이다. 결국 동아일보는 민족의 삶의 방식을 문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신문지면 위에 배치하고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서 그 역할을 상호 보완할 수 있게 된다.

동아일보는 지난 100년 동안 한국 현대사의 살아 있는 기록을 축적해 놓음으로써 그 자체로서 생활 문화의 거대한 아카이브가 되었다. 신문 기사 자체가 가지는 기록으로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보존 활용하기 위해 일찍부터 이를 독자적으로 분류 정리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데이터베이스로 처리하여 신문의 기사 내용을 모두 손쉽게 컴퓨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도록 그 활용성을 높였다. 일찍이 신문 지면의 이른바 축쇄판을 자체 제작하여 널리 보급한 것도 동아일보다. 동아일보는 한국 문화의 근대적 변화와 그 모더니티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자료들을 모두 일반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함으로써 문화적 민주주의의 신념을 자연스럽게 실천하고 있다.

지금 동아일보는 다양한 매체가 융합하면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불확실한 미래를 앞두고 있다. 새로운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을 놓고 대중 독자의 관심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종합 문화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새롭게 구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주의라는 주지를 앞에 두고 그 영역의 확장에서 드러나는 문화의 공간성과 시간성의 무한 개념을 더욱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동아일보 문화주의 200년을 다시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일본에서 불러일으키고 있는 새로운 바람이 흥미롭다. 이 소설은 이미 국내에서 백만 부를 훨씬 넘는 초대형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지난 해 영화화 되면서 김지영이라는 이름은 여성과 세대 문제에 관한 다양한 사회문화적 담론을 생산해내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기도 했다. 이 소설이 일본에서 번역 출간된 것은 2018년 말이다. 그런데 지쿠마 서방[筑摩書房]에서 책이 나오자마자 중판이 거듭되었고 3개월 만에 9만부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꾸준히 인기를 모으면서 지난 한 해 동안 15만부를 넘는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2019년도 일본 문예물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게 된 것은 물론이고 이 기간 동안 일본에 번역 소개된 외국문학 작품 가운데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책이 일본에서 불러일으키고 있는 반향을 두고 일본 현지의 언론과 비평가들도 모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작가인 조남주 씨를 초청한 강연회가 도쿄에서 열려 상황을 이루었고 번역자인 사이토 마리코 씨가 방송에 출연하여 이 작품을 소개하는 등 지금까지 볼 수 없던 현상이 나타났다. 요미우리신문과 아사히신문이 잇달아 2019년도 문예 부문을 총결산하는 시리즈물 기사에서82년생 김지영의 등장을 단연 화제의 중심으로 내세웠고, 이 소설이 한국에서 불러일으켰던 페미니즘 논란에 주목하였다. 특히 한국의 독자들이 보여주었던 사회비판적 목소리와는 달리 일본의 여성 독자들은 소설 속의 여주인공 김지영에게 공감하면서 함께 울었다고 적기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기 전 일본에서 이루어진 한국 소설 가운데 화제가 되었던 경우는 최인호, 윤흥길, 조정래 씨 등의 작품이 있다. 그런데 2011년에 번역 출판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당해 연도에 4쇄를 넘기면서 그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출판사 쿠온(Cuon)이 기획 출판하고 있는 새로운 한국의 문학시리즈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비롯하여 두근두근 내 인생(김애란), 원더 보이(김연수), 아오이 가든(편혜영)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성격의 출판으로는 쇼분샤가 기획한 한국문학의 선물이라는 시리즈인데, 한강, 박민규, 황정은, 김금희, 천명관 등의 소설이 번역 출판되고 있다. 출판사 쇼시 칸칸보[書肆侃侃房]에서 기획한 한국 여성문학 시리즈는 김인숙의안녕 엘레나를 시작으로 정유정의7년의 밤,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편혜영의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이들 이외에도 많은 작품들의 번역 출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같은 새로운 출판 경향은 현재 일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의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이나 TV 드라마의 인기 등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지만 의미 있는 변화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소설의 당대적 경향을 곧바로 일본의 독자층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학을 곧바로 수용하여 한국의 독서 시장에 내놓던 현상이 그대로 역전되어 나타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한국의 당대 문학의 경향을 일본 출판계가 그대로 공유하게 됨 셈이다.

돌이켜 보건대, 한국문학은 근대문학의 초창기부터 일본문학에 크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신소설의 시대를 열었던 이인직도 일본 유학을 통해 소설의 대중적 성격과 신문 연재의 묘미를 터득했다. 이광수의 문학시대를 주도했던 청년 이광수가 무정(1917)을 발표했던 것은 와세다 대학 학창시절에 경험했던 일본 근대문학의 풍경 속에서의 일이었다. 근대적 자유시의 형식을 탐구하였던 김억이나 주요한도 모두 일본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그러므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라는 거대한 권력 구조 안에서 한국 근대문학은 일본문학의 흐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식민지 시대의 비평가 임화가 주창했던 모방과 이식(移植)’의 문학이라는 명제는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지금도 일본 유명 작가들의 소설은 한국의 출판 시장에서 잘 나가는 인기 품목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적 역량은 사실 한국의 독자들에 의해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평가받았다. 더구나 1990년대 이후 등단한 우리 작가들 가운데 하루키세대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과 일본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붙어 있다. 두 나라 사이의 문화적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한국의 대중음악이나 TV드라마가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이른바 한류라는 특이한 문화 현상을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한국문학에는 일본 젊은이들이 열광했던 가수 보아도 없고, 일본 여성들이 박수했던 배우 욘사마도 없다. 한국의 근대문학이 성립된 이후 한 세기를 넘어서는 동안 한국문학은 그 존재 의미를 일본의 독자들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국의 유명 작가의 대표작들이 우수한 번역자들에 의해 번역 출판되었지만 일본의 독자들은 한국문학이 제기하는 삶의 문제에 대한 깊이에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 일본 사회에 던지는 목소리가 앞으로 얼마나 크게 번지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미 15만 이상의 독자가 이 소설이 던지는 사회문화적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이 작가가 제기하는 인간의 삶과 그 존재 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에도 공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랜 동안 일본 문학에 빚져온 역사적 정신적 부채를 벗어나고 있는 이 소설이 일본 출판 시장에서 불러일으키는 파장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