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그리고 뜨거운 한류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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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BTS에 관한 강의가 개설되었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화제가 된 바 있다. 한국의 언론이 크게 보도했고 미국에서도 교민들 사이에 관심이 크게 일었었다. 내가 만났던 교민 가운데 이 강의 이야기를 직접 내게 물었던 분들도 있다. 지난해 봄 학기에 버클리대학에 개설되었던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 방탄소년단”(Next Generation Leaders: BTS)이라는 강좌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버클리대학은 매학기 다양한 강좌와 교육 프로그램을 폭넓게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디칼’(DECAL)이라는 약자로 흔히 표기하는 민주적 교육 프로그램’(Democratic Education at Cal)이다. 이 프로그램은 버클리대학 학생들이 직접 개설하고 스스로 참여하여 지식을 공유하는 열린 강좌이다. 물론 지도교수도 정해져 있지만 지도교수가 직접 강의를 이끌어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과정을 학생들 스스로 설계하고 직접 운영한다. 강좌 내용과 관련되는 모든 자료들을 학생들이 모두 참여하여 조사하고 그 내용을 분담하여 보고하고 토론한다. 과목당 일정 기준에 의해 2학점을 자율적으로 부여하는데 A, B, C와 같은 평점을 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성격의 강좌가 매 학기 150 강좌 이상 운영되고 있으며 강좌마다 대개 30명 안팎의 학생들이 참가하고 있다.

버클리대학의 학생들이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라는 주제로 한국의 유명한 아이돌그룹 BTS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직접 교과 내용을 설계하여 운영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고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동년배의 미국 대학생들에게 BTS의 음악과 그 활동이 새로운 문화적 흐름의 어떤 징후로 읽혀지고 있음을 말한다. BTS의 음악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기획사에 의해 잘 다듬어져 세상에 내놓은 문화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21세기 초반 세계 문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뮤지션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BTS는 멋진 의상, 유명 음악인들이 만들어주는 자유로운 음악,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터득한 현란한 몸짓, 그리고 전 세계 같은 또래들이 보내주는 환호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새로운 음악인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가지게 된 셈이다.

전 세계의 젊은이들도 BTS의 음악에 열광한다. 이미 BTS의 뮤직 비디오 가운데 8억뷰를 돌파한 ‘DNA’가 유명하지만 불 타 오르네 (파이어)’ ‘페이크 러브’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보이 위드 러브)’ 등이 모두 6억뷰를 넘어선 바 있다. 최근에 공개한 마이크 드롭리믹스 뮤직비디오도 단 순간에 유튜브 조회 수 6억뷰를 기록했다고 한다. BTS의 뮤직비디오는 독특하고 강렬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그룹 전체의 화려한 퍼포먼스와 거기에 가미된 세련된 영상미가 매력을 발하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빌보드의 각종 차트를 가장 뜨겁게 달궜던 BTS의 음악은 이제 21세기의 비틀즈로 세계의 음악팬들에게 각인되고 있다.

내가 미국에서 실감했던 것도 BTS의 인기이다. 미국의 대중적인 서점 체인인 반스 앤드 노블은 지난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의 세일기간에 서점을 찾는 손님들을 잡기 위해 다양한 상품을 준비했다.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각종 캐릭터와 장난감들이 온통 매장 안을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점 한복판에 만들어 놓은 특별 코너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BTS. ‘K-POP’이라는 붉은 글씨가 네온사인처럼 반짝이는 이 특별 코너에는 BTS 멤버들의 사진과 음반 그리고 각종 캐릭터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장식되어 있다. 학교를 파한 뒤에 서점에 들른 이웃 고등학교 학생들이 줄을 지어 BTS의 특별 코너를 둘러싸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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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류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런 이야기라면 지난해 아카데미상을 휩쓴 기생충이 다시 생각난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버클리대학 캠퍼스를 벗어나 도로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감상했다. 늦가을부터 상영되기 시작한 이 영화는 지금도 미국의 영화팬들을 사로잡고 있다.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이 북미 지역에서도 각종 영화상을 휩쓸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진가를 다시 확인해 볼 수 있다. 시카고 영화비평가협회로부터 작품상을 비롯하여 감독상, 각본상, 외국어영화상 등 4개 부분을 받았고 최근 샌프란시스코 영화비평가협회로부터도 감독상, 각본상, 외국어영화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영화전문가들은 기생충이 높은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성까지 갖췄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평판과 인기에 힘입어 기생충은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상인 골든글로브에 감독상, 각본상, 외국어영화상 등 3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고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세계 영화의 꽃으로 주목받는 아카데미에서도 한국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작품상을 받았다. K-드라마에 이어 이제 K-필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K-뷰티라는 말도 생겨났다. 미국의 대형 약국 체인점인 CVS에 들어가면 입구에 설치된 ‘K-BEAUTY’ 특별 코너를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유행하며 널리 팔리고 있는 화장품류가 전시되어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마스크 팩이다. K-푸드에도 관심이 크다. 웬만한 슈퍼마켓에는 한국에서 직수입되는 김치라면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간다. 한때는 그 특유의 냄새와 맛 때문에 혐오 식품처럼 취급되었던 김치가 건강식품으로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의 식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뉴욕이나 LA의 한인 타운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식당에서 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메뉴는 순두부찌개, 돌솥비빔밥, 해장국 등이다. 매운 맛에 입맛을 들인 사람들이 떡볶이를 간식으로 즐기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특이한 문화현상은 한류의 확산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쩌면 이것은 전 세계에서 애용되고 있는 한국산 자동차와 각종 가전제품들의 인기와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산 자동차를 타고 날마다 직장에 출근하는 미국 중산층 직장인의 집안을 보면 대개 거실 한복판에 한국산 대형 평판 텔레비전이 놓여 있다. 주방에 비치된 냉장고도 한국에서 수출한 고급 대형 냉장고가 비치되어 있고 세탁기기와 건조기도 모두 한국산이다. 손에는 한국산 휴대전화를 들고 다닌다. 미국인들의 일상에 그만큼 한국이 가까이 접근해 있으며, 다문화사회를 표방하고 있는 미국에서 한류가 그 나름의 중요한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TV드라마나 대중음악에서 시작된 대중문화의 해외 유통과 소비가 작은 한류의 출발이었다면, 이제는 음식이나 패션, 그리고 생활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적 현상은 특정한 분야나 지역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한때의 유행이 아니다. 전 지구적인 현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확산의 속도가 빠르고 그 폭과 영향이 커지고 있다. 게다가 한류의 저변에 세계어로 자리잡은 한국어와 한글의 보급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자랑스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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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한류는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라는 말로 통한다. 하지만 이 말보다는 K-팝이라는 말이 한류를 대표한다. 한국의 대중음악, TV드라마, 영화, 컴퓨터게임 등의 문화상품이 일본 중국 그리고 동남아 등지의 해외로 전파되어 널리 소비되는 현상은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초기에는 한류라는 특이한 문화 현상을 태평양 건너 동남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수한 문화 소비 형태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떤 교수는 아예 한류라는 말 자체를 부인하려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한류 현상은 전 세계에서 여기저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문화상품의 가장 큰 소비시장을 거느리고 있는 미국에서도 한류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현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맥도널드 햄버거는 전 세계에서 팔린다. 스타박스 커피숍이 각국의 중요 도시에 늘어서 있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내는 영화가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미국의 팝 가수 비욘세의 노래에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한다. 이런 일은 미국인들에게 너무도 당연하며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산 김치와 라면이 미국의 슈퍼마켓에 즐비하고 한국의 연안 바다에서 나오는 김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맥주 안주로 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기이하고 새롭다. 더구나 팝의 본고장에서 K팝 그룹 BTS가 누리는 인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아무도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섣부르게 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BTS의 열기를 두고 한국문화의 세계화를 지칭하는 한류현상이라고 말한다면 이제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이른바 문화상품의 대중적 소비와 그 흐름을 놓고 볼 때 문화의 세계화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세계 각국의 대중은 그들이 선호하는 대중음악으로 BTS의 뮤직비디오를 즐기며 모두 하나가 된 지구를 떠올릴 것이 분명하다. 유튜브라는 특이한 매체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BTS의 전신자(傳信者)로서의 자신들의 존재와 역할을 강조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BTS를 하나의 잘 기획된 문화상품이라고 한다면 이 특이한 현상은 결국 세계화라는 물결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 거대한 문화시장의 역동성을 그대로 말해주는 셈이다.

그렇지만 BTS는 일시적으로 소비되는 문화상품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러한 주장은 BTS의 등장과 그 역할과 대중적 인기를 경제 논리에 의해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맥락을 같이한다. BTS를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본다면 BTS ‘신드롬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음악과 춤에 대한 열광적 환호는 금방 시들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언제 어디서든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다시 되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BTS21세기 문화의 새로운 흐름 속에 음악적 정체성을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이 앞장서서 추구하고 대중이 뒤에서 지지하며 따를 수 있는 새로운 음악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에 주력해야 한다. 비틀스가 자신들의 음악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의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것처럼 BTS는 자기 음악에 집중하면서 자기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열어가야 한다. 전 지구상에서 BTS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윤리, 자신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예술과 미학에 자기 색깔의 음악의 옷을 입힐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중의 인기는 허망하게 바로 사라진다. BTS가 잘 팔리는 문화상품으로 지금의 대중적 인기에 만족할 것인지 새로운 음악,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위대한 뮤지션으로 커나갈 것인지는 이제 BTS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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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폰에 매달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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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좌석에 앉아 있는 승객들이 대부분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동영상 화면을 재미있어 하면서 보는 사람, 뉴스를 보는 사람, 만화 화면을 펼쳐보는 사람,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람...... 모두가 그 작은 화면에 열중이다. 책을 펼쳐 들고 있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 길거리에서도 공원의 산책길에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책을 만드는 출판사도 이 새로운 환경의 변화와 매체의 특성을 무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책이 안 팔린다고 야단이다. 서점에 내놓은 책 가운데 그나마 팔리는 것은 자기개발서이거나 취업 준비용이 많다는 것이다. 유명 작가의 신간 소설도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니 출판업계가 모두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독서 인구가 많기로 유명한 일본에서도 출판계와 서적시장이 불황이란다. 미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책 대신 스마트 폰을 들고 작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세상이 이렇게 바뀐 것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가구당 월평균 소비 지출액은 250만원을 조금 넘는다. 통계청이 발표한 이 통계자료에서 가구당 오락·문화 부문 지출이 월평균 192000원이라고 한다. 전년보다 거의 10% 증가했단다. 한국출판저작권연구소에서는 이 자료에 근거하여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월 평균 도서 구매 비용이 4960원이라는 흥미로운 분석 결과를 내놓고 있다. 가구당으로 따지면 월평균 도서 구매비가 명목액 기준으로 12000원 정도이지만, 2006년 이래 역대 최저치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수치를 두고 가구당 한 달에 책 한 권 정도를 구매하고 있다는 뜻으로 간단하게 넘겨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자녀들의 학습용 참고서 구매를 제외하고 본다면, 집에서 책을 사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고급 커피숍에서 지불하는 커피 한 잔 값 정도에 불과한 액수가 한 달에 책을 사는 데에 쓰는 돈이라고 말하면 좀더 실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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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을 꺼내면, 요즘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책 타령이냐고 핀잔을 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달에 책 한 권도 제대로 사지 않는 것을 빠듯한 살림살이 탓으로만 돌릴 일은 아니다. 가구당 월평균 통신비가 134000원이었다는 통계가 바로 뒤에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집에서 매달 지출하는 여행비용을 비롯하여 영화 구경이나 공연 관람, 서적 구입 등 문화 오락비에 버금갈 정도로 통신비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 네 식구가 함께 사는 집이라면 1인당 35천원 가까이 통신비를 지출하고 있는 셈이다. 식구마다 모두 자기 휴대전화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물론 책 대신 스마트 폰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스마트 폰을 누르면 찾을 수가 있으니 구태여 돈을 써서 책을 사고 답답하게 책장을 또 넘겨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핑계를 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스마트 폰의 사용 내역을 들여다보면 그런 말에 수긍하기가 쉽지 않다.

책 읽기를 말하면 독서는 자기 취미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중 고등학교 학창 시절에 대학 입시에 매달려 지겹게 책과 씨름했고,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 취업 준비로 다시 손에 잡은 것이 각종 시험 준비서 뿐이었다는 것이다. 가까스로 직장으로 얻어 생활 전선에 뛰어든 사람들은 아예 책을 펼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다. 주어진 업무에 시달리고 반복되는 모임에 지쳐 돌아오면 집에 들어와 책장을 넘길 틈도 없다. 자녀들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는데 집안 살림에 쫓기면서 주부들이 언제 혼자서 책을 들고 읽어볼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바쁘고 여유가 없고 한가하게 책장을 넘길 틈이 없다. 그러니 여간 결심이 아니고서는 서점이라도 한번 들러 책 한 권 사들고 오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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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책 읽기가 개인의 취향이나 관심과 연관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데에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따질 일은 더욱 아니다. 책 읽기는 교양인의 생활이어야 한다. 책 읽기는 자기 집중을 필요로 한다. 텔레비전의 화면이나 스마트 폰 속의 동영상은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이지만 책은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그 내용을 따라간다. 책 읽기는 사고의 집중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해와 비판, 분석과 성찰의 힘을 키워준다. 그러므로 책 읽기는 생활 속에서 필수의 영역이지 개인적 취향에 따르는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책 읽기를 생활화하기 위해서는 늘 곁에 책을 펼쳐놓아야 한다. 자신이 직접 서점에 가서 서가에 진열된 책들을 훑어보고 읽고 싶은 책을 골라보는 것이 가장 좋다. 물론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를 정하는 일에서부터 직접 책을 사는 데까지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낼 일은 아니다. 우선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을 잘 생각하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한다. 책은 혼자서 읽을 수 있지만 서로 의견을 나누며 함께 꾸준히 읽어갈 동료가 있다면 훨씬 좋다. 집안 식구들끼리라든지 직장 동료들이든지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책을 읽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문화 활동이 어디 있겠는가? 책 읽기는 습관화하기 전까지는 생활 속에 터잡기 어렵다. 일상의 모든 일들이 책 읽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대로 책 읽기를 시작하면 큰 부담 없이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다. 책 읽기가 고상한 취미에서 고급한 문화 활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평생 책을 끼고 살아왔다. 나의 책 읽기는 내 문학 공부의 출발이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책 읽기가 일종의 직업이 되면 때로는 짜증나고 힘이 든다. 텍스트를 가운데 두고 작가와 맞서야 하는 일이 늘 피곤하다. 그러므로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즐겁고 편한 책 읽기를 권한다. 되도록이면 한 달에 한 권씩 새로 나온 시집을 사서 읽으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집 한 권을 사서 읽어보는 일이라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큰 부담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작은 시집 한 권이지만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정채(精彩)의 언어가 거기에 담겨 있다. 온통 더럽혀진 언어의 흙탕물 속에서 벗어나 정제된 언어 표현의 묘미를 오롯하게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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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의 일이다. 집집마다 거실의 장식장을 걷어내고 그것을 서가로 바꾸자는 운동이 일어났었다. 생활 속에서 책과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낸 방안이었다. 그때는 상당한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파트의 거실 벽에 책장을 세우고 책을 가지런히 꽂아둔 집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운동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다시 커다란 TV가 벽면을 장식하고 근사한 도자기나 사진틀로 가득 찬 새로운 장식장이 서가를 다시 퇴출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거실에 서가를이라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많은 호응에도 불구하고 왜 생활 속의 책 읽기로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는지 모르겠다. 책 읽기를 생활 속에 정착시킬 수 있는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이 뒤따르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삶은 스스로를 황폐하게 만든다. 책을 읽으면서 사고력과 판단력을 키우지 않으면 삶의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 사라진다. 인간이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에만 매달리게 되면 결국은 모두가 야만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스마트 폰에만 매달린 채 한 달에 커피 한 잔 값도 책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첨단의 문명시대를 살아가는 참다운 태도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감각적 자극에만 길들여지는 스마트 폰 시대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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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wonsnu 2020.08.06 19:01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전자책은 앞으로 출판이 나아가야할 큰 방향의 하나이지요.

나도향이 남긴 시조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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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잡지들을 넘기다가 우연히 찾은 것이 나도향(1902-1926)이 남긴 시조 한 수다. 나도향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거니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시조 한 수를 남겼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시조의 제목은 버들이다.

보다가 말하다가
그래도 모자라서
서창 앞 버들가지
내 맘 매어 두고 왔소
바람에 창 두들기거든
내 맘 여겨

 

내 맘을 말로 못하고
버들피리 혀를 내어
허공 중천에
힘껏 내어 불었더니
피리도 제 가슴 타는지
우는 듯 우는 듯

 

봄 정에 애타는 맘
버들야 알듯한데
길길이 늘어져
못에 시쳐 끊어져도
나의 맘 그의 맘을
얽어 놀 줄 왜 모르니

 

이 시조는 나도향이 죽은 뒤에 그를 회고하는 김억의 나도향 군의 유고에(현대평론, 1927. 8)라는 글 속에 포함되어 있다. 김억은 당시 가면(假面)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던 중이었다. 그는 나도향에게 단편소설을 한 편 쓰도록 청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부탁한 소설 대신에 시조 한 수를 보내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김억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때 내가 단편소설을 하나 써달랜 것이 소설을 써 보내지 아니하고 시조를 보내면서 천하일품의 시조를 보내니 광영으로 알고 실어 주게하는 편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천하일품이면 다른 곳에 팔아서 술잔거리나 삼고 내게는 다시 단편을 써 주게하는 답장을 보내고 다른 원고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와야 할 원고는 오지 아니하고 기일은 넘어가 버려 그대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 향기롭지 못한 이름이라 할 유고두 글자를 붙여가지고 발표되리라고야 나는 물론이요 나 군 역시 뜻밖이었을 것이니 사람의 일이란 참말 모를 것이다.

나도향이 유작으로 남긴 시조 한 수는 그가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사랑의 절절한 심정을 가슴에 품고 살았음을 보여준다. 나도향이 이 작품을 쓴 시기는 1920년대 중반 문단의 관심사가 되었던 시조부흥운동과 서로 겹쳐 있다. 시조부흥운동은 전통적 문학 형식이었던 시조를 현대적으로 다시 창작하자는 데에 그 목표를 둔 것이다. 최남선을 위시하여 이병기, 이은상 등에 의해 주도된 시조부흥운동은 시조시학의 성립을 촉진하게 되었으며, 시조의 전아한 기풍과 새로운 시대정신의 결합을 시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최남선의 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1926)라는 글은 시조 부흥에 대한 그의 신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서 국민문학이라는 용어 자체의 출현을 낳기도 했다. 그가 펴낸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1926)는 시조부흥운동의 실천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도향의 시조는 이와 같은 당대의 문단적 분위기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이상의 변화나 발전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작품이 그대로 그의 유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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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향의 본명은 경손(慶孫)이다. 대대로 의약을 업으로 삼는 집안에서 13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종화가 쓴 도향 나빈 소전(신민, 1926. 9)을 보면 그의 조부는 서울 장안에서 이름난 한방의 명의였고 그의 부친 또한 의사였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그는 조부와 부친의 권유에 따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의학 공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결국 일년 만에 학교를 중퇴하였다. 그는 집안 어른들의 뜻과는 달리 혼자서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그렇게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누구도 그의 행동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도쿄에서 공부할 수 있는 학비를 전혀 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일본 생활을 접고 귀국한 후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가족과 관계를 끊어버렸다.

나도향의 문학적 글쓰기는 집안 어른들에 대한 반항으로 시작되었고, 가출 소년으로서 겪어야 했던 가난과 방랑 속에서 발전하였다. 그가 문단에 이름을 제대로 알린 것은 1922년 박종화, 홍사용, 이상화, 현진건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백조동인으로 참가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동인지의 창간호에 그는 단편소설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했고 잇달아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을 내놓으면서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나도향은 스무 살의 나이에 장편소설 환희(幻戱)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이 작품은 나도향의 첫 장편소설일 뿐만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1917) 이후 신문에 연재된 첫 번째의 창작소설이라는 점에 문단의 관심을 모았다. 더구나 이 작품을 탈고한 것이 나도향의 나이 열아홉 때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자들을 놀라게 했거니와 그 작가적 천품에 모두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을 향한 개인적 열정을 실현하기 위해 문학에 뛰어든 이 소년 문사를 놓고 시인 홍사용은 오랑캐꽃내 같은 그의 작품은 돌개바람같이 창작계를 풍미했다고 적었다. 나도향은 환희의 연재에 앞서 이 소설이 남에게 내놓기 부끄러울 만치 푸른 기운이 들고 풋내가 난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푸른 기운이 돌고 상긋한 풋내가 나는 것으로 도리혀 성과의 예감을 깨닫게 된다고 자부했다. 그의 절친이었던 박종화는 이 소설이 청춘남녀의 연내의 갈등을 그린 것이나 낭만적 경향이 농후하다고 평하면서 좀더 높은 곳에 올라앉아 이 주인공들의 장난을 본다면 한 마당 환희와 같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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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환희의 중심인물로는 서울 갑부 이상국의 배다른 남매가 등장한다. 은행 직원 이영철과 여학교에 다니고 있는 혜숙이라는 젊은이다. 소설의 이야기 속에서 두 남매가 각각 추구하는 낭만적 사랑과 참된 행복이라는 주제는 당대의 현실로 본다면 개인의 자기 각성이라는 계몽적 담론과도 이어진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들의 열정을 그대로 용납하지 않은 채 두 남매가 애욕의 문제에 얽혀 고뇌 속에서 좌절하고 파멸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런데 환희의 여주인공 혜숙이 물질적 욕망에 빠져들어 자기 사랑을 배반하게 되는 모티프는 이미 신파소설 장한몽을 통해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와 흡사하다. 이 소설에서 독자들을 관심을 모았던 영철과 기생 설화의 연애는 자기모순을 헤쳐 나가기 위해 고뇌에 휩싸여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 낭만적 연애는 무정에서 기생 박영채가 화류계를 벗어나게 되는 계몽적 서사구성의 허구성에 대응하고자 하는 작가적 의욕을 보여준다. 연애의 기쁨도 사랑의 고통도 이 소설 속의 젊은이들에게는 모두 자신들의 몫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도향은 환희의 연재가 끝나자 장안의 스타가 되었지만 엄격한 조부는 끝내 그의 문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1925년 단편소설 물레방아, , 벙어리 삼룡등을 통해 보다 완숙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뒤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하지만 가난한 그를 맞아줄 수 있는 어떤 자리도 도쿄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1926년 병객의 몸이 되어 돌아온 그는 끝내 가족의 곁으로 가지 못한 채 스물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박종화는 , 박행한 천재여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 나도향의 죽음은 초창기 문단이 처음으로 쓰는 가장 가슴 아픈 애사(哀詞)가 되었다. 나도향의 시조 버들은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써놓은 아픈 사랑의 노래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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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창간 100년 그리고 문화주의

창천(蒼天)에 태양이 빛나고 대지에 청풍이 불도다.’ 동아일보의 창간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아일보는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내세우면서 첫째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 둘째 민주주의 지지, 셋째 문화주의 제창이라는 3대 주지(主旨)로서 그 창간의 의의를 선포한다. 이 세 가지 목표 가운데 유별난 것이 바로 문화주의다.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 내용을 충실히 하며 풍부히 함이니 곧 부()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과 도덕의 순수와 종교의 풍성과 과학의 발달과 철학 예술의 심원오묘(深遠奧妙).’

동아일보가 내세운 문화주의100년 전의 창간 당시를 돌아보면 그 자체가 낯설다. 문화주의라는 말은 동아일보 이전의 국내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용어다. 문화라는 말조차도 대중 독자들에게는 그리 친숙하지 않았던 시대가 아닌가? ‘주의(主義)’라는 말이 붙어 있는 문화주의라는 합성어에는 그 지시 영역과 의미의 범주화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미묘한 힘이 담겨 있다. 문화주의는 지식과 교양이라는 문화의 보편적 의미 영역에서 그 관념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실천적 의지를 포함한다. 그리고 동시에 실질적이면서 구체적인 민족의 삶의 모든 활동 영역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괄하고자 하는 의욕을 드러낸다. 이 엄청난 구상이야말로 동아일보의 새로운 탄생에서 문화주의의 제창을 다시 주목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동아일보의 문화주의에는 민족을 그 주체로 내세울 수 없었던 식민지 현실의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여기서 문화주의는 문화통치를 표방했던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대한 표면적 수용과 정신적 저항이라는 양가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화주의라는 말이 겉으로 드러내는 보편적 가치 지향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민족의 문화또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위장되어 있다. 문화는 그 형성의 주체가 되는 민족의 삶과 현실을 떠나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동아일보는 창간과 함께 일제의 강압적 언론 규제를 견디어내야 했고 정치 사회적 이념의 균형 문제로 상당한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 내세운 문화주의의 주지를 끝까지 지켜낸다. 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에서 드러나는 대중적 수용의 익명성은 신문사 자체가 주관하는 다채로운 행사를 통해 조화롭게 포용한다. 그리고 문화의 넓은 영역 안에서 언론의 민주주의적 가치와 상업주의적 요구의 이질적 충돌까지도 신문지면 배분의 균형과 형평성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동아일보는 민족의 삶의 방식과 그 내용을 내적으로 형성하는 정신적 실체의 규명에 언제나 앞장서 왔다. 민족 전체의 삶에서 드러나는 중요 관심사와 그 실질적 가치를 사회 각 방면의 제도와 활동을 통해 확인 취재하고 이를 널리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문화의 영역과 그 위계가 상상적으로 구획되면서 정치, 국제관계, 경제, 지역사회 등에서 일어나는 숱한 사건들이 신문지면 위에 분할 배치된다. 고급한 예술의 모든 양식은 물론 개인적인 지적 탐구활동까지도 여기에 포함되었고, 사소한 일상도 문화적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내용을 신문지면 위에 가시적으로 펼쳐놓기 시작한다. 더구나 국내의 각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지구 반대쪽의 외국 사정과 함께 같은 지면 위에 소개되면서 그 삶의 모습이 새롭게 조명된다. 이 같은 삶의 동시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동아일보가 주창하고 있는 문화주의의 가치를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의 지면을 넘겨보면, 창간 1주년에 단군(檀君)의 영정을 공모하고 백두산 천지(天池)를 신문지면 위로 옮겨놓고 있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근원을 밝히고 동아(東亞) 문명의 출발점을 알리기 위한 일이다. 동아일보는 인도의 시성(詩聖)으로 칭송되었던 타고르의 입을 통해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 시기에 / 빛나던 등촉 하나인 조선 /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라고 노래 부르게 한다. 일본 지식인으로 미술비평의 권위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일본의 칼날이 아니라 한국은 그 예술의 미로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거니와 지배자인 일본인의 눈을 통해 한국 전통예술의 미()적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도록 한 것도 동아일보다. 식민지 지배 상황 속에서 이보다 더 가슴 벅찬 민족 문화의 표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동아일보는 신문사 자체의 사회계몽 사업으로 문자보급운동을 선도했다.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언문 표기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조선어 교육의 축소 제한 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 동아일보였다. 그리고 스스로 한글강습을 주도하면서 민족의 교육과 지식 정보의 대중적 보급을 직접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 특이한 민족어 운동은 일본어를 국어라고 강요했던 식민지 문화정책에 동아일보가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지배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의 공식화에 맞선 피식민지 민족어의 생존 투쟁이라고 할 만하다. 동아일보가 지향하는 문화주의의 탈식민적 성격이 여기서 드러나고 있다.

동아일보는 문화주의의 주지 아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스포츠를 문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각종 스프츠 대회를 주최하고 후원하면서 체육과 보건이 민족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주지시켰고 민간 중심의 체육회 결성을 주도하면서 한국 민족의 우수성을 스포츠를 통해 강조한다.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安昌男)이 일본에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우고 조종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안창남 고국 비행을 위해 모금을 주도한 것도 동아일보다. 안창남이 민족의 성금으로 마련한 비행기 금강호(金剛號)를 타고 서울 상공을 왕복 비행하던 모습은 동아일보 지면에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한국의 아들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1위로 결승선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신문의 첫 머리에 그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올렸던 것도 동아일보다. 이 유명한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폐간의 위기에까지 몰렸지만 동아일보는 민족의 열정과 울분을 그렇게 대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사회생활에서 소외되었던 여성을 신문의 지면 위로 끌어내고 그 역할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놓았다. ‘안살림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져 있었던 육아, 요리, 복식 등의 가정생활을 신문의 기삿거리로 만들어 사회문화적 관심사로 키워낸다. 어린이를 위한 지면을 별도로 만들고 청소년의 참여를 위해 투고를 장려한다. 낡은 것으로 버려진 채 민간에만 전해졌던 전래의 연희를 전통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신문의 지면 위에 올려놓은 것도 동아일보다. 민족문화의 저력이 민속과 전통 연희의 그 오랜 역사 속에 살아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한유(閑遊)의 여기(餘技)에 불과했던 바둑을 지적(知的) 스포츠의 하나로 승격시켜 신문지면에 바둑판을 깔아놓은 것도 동아일보가 아닌가?

동아일보는 신문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대중매체의 보도 기능을 확대하기 위해 문화적 융합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업 확장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신문사 안에 별도의 조직으로 출판국을 설치하고 <신동아>, <신가정> 등의 잡지를 출간함으로써 신문사의 이른바 자매지 시대를 열어놓은 셈이다. 해방 이후에는 방송이라는 새로운 영역에도 진출한다. 신문과 출판의 결합에 이어 방송과의 연결을 통해 매체와 제도의 변혁과 융합을 선도하게 된 것이다. 결국 동아일보는 민족의 삶의 방식을 문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신문지면 위에 배치하고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서 그 역할을 상호 보완할 수 있게 된다.

동아일보는 지난 100년 동안 한국 현대사의 살아 있는 기록을 축적해 놓음으로써 그 자체로서 생활 문화의 거대한 아카이브가 되었다. 신문 기사 자체가 가지는 기록으로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보존 활용하기 위해 일찍부터 이를 독자적으로 분류 정리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데이터베이스로 처리하여 신문의 기사 내용을 모두 손쉽게 컴퓨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도록 그 활용성을 높였다. 일찍이 신문 지면의 이른바 축쇄판을 자체 제작하여 널리 보급한 것도 동아일보다. 동아일보는 한국 문화의 근대적 변화와 그 모더니티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자료들을 모두 일반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함으로써 문화적 민주주의의 신념을 자연스럽게 실천하고 있다.

지금 동아일보는 다양한 매체가 융합하면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불확실한 미래를 앞두고 있다. 새로운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을 놓고 대중 독자의 관심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종합 문화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새롭게 구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주의라는 주지를 앞에 두고 그 영역의 확장에서 드러나는 문화의 공간성과 시간성의 무한 개념을 더욱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동아일보 문화주의 200년을 다시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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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만남 그리고 헤어짐

- 고 김윤식 교수님을 생각하며

 

1

 

내가 김윤식 교수를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서울대 문리과대학이 종합화 계획에 따라 관악 캠퍼스로 이전한 뒤의 일이다. 벌써 40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대학원을 마친 후 병역의무를 끝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국문학과의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다른 대학에 시간강사를 맡아 하루 출강하는 일을 빼고는 매일 학과 사무실에 나가서 여러 가지 사무를 처리해야만 하였다. 그 무렵부터 나는 문단의 말석에 끼어 잡지에 월평을 겨우 쓰기 시작하였다. 문리대 시절과 달리 관악 캠퍼스에서는 서울대학교 교양학부 국어과가 문리과대학 국문학과로 통합되면서 인문대학 국문학과가 되었기 때문에 교수님들도 많았고 학과 사무실은 한가한 날이 없었다. 더구나 유신독재 체제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로 캠퍼스가 늘 어수선했다.

어느 날 오전이었다. 학과 사무실의 내 책상 위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내가 전화기를 들자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김윤식이오. 내 방에 와서 차 한잔 하고 가소.’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사무실에서 보조로 일하던 아르바이트 학생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내게 말했다. 4층 복도에서 김윤식 교수님을 만났는데 권 선생 나와 있느냐고 물으셨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나는 김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교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창문턱에 놓은 컵 하나를 집어서 내게 건네며 결명자 끓인 물을 따라 주었다.

앉소.’

나는 의자를 끌어내어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김 교수는 읽던 책을 덮어두고는 앞뒤도 없이 이렇게 물었다.

그래, 권형은 앞으로 계속 평론도 쓸 생각이오?’

나는 무어라고 대답도 못하고 엉거주춤했다. 그랬더니 다시 이렇게 말씀을 했다.

평론이라는 게 그리 간단치 않은데...... 그렇게 힘들여 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내가 ?’ 하면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으니 김 교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권형이 쓴 월평 보았어요. 그런데 소설 월평이라는 것은 그렇게 힘들여 쓰면 아무도 안 봐요. 월평이라는 것은 작가에게 한 마디 말을 걸어보는 거지요. 말을 한번 슬쩍 걸어보면 그만입니다. 작가는 그걸 봅니다. 자기에게 비평가가 말을 걸어오니까. 그런데 권형은 너무 정직하게 머리로 짜내어 그 짧은 글에서 논리를 세워보려고 애를 쓰더구만. 작가는 자기 소설에 대해서는 조물주이지요. 자기가 만든 소설이라는 작은 세계를 완벽하게 장악하니까. 우리 작가들의 단수가 아주 높아요. 그러니 남의 말에 콧방귀도 안 뀌지요.’

나는 이게 무슨 말씀인지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뜨거운 결명자 차를 마시기만 했다.

문단에 친구가 많소?’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 말씀을 이었다.

우리 작가들은 모두 똑똑하고 제 잘난 맛에 살지요. 영리하기가 어떤 경우에는 교활하다고 할 정도지요. 세상에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경험도 많고 말솜씨도 좋고 술도 잘 마시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머리로 싸우는 것은 바보입니다. 그러니까 월평에서 작품을 언급하는 것은 한 마디 작가에게 말걸기를 해 보는 정도여야 적당해요. 한 마디 툭 던지면 됩니다. 그러면 작가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다 눈치를 채지요.’

나는 월평의 방법에 대한 김 교수의 설명에 놀랐지만 내 서툰 글이 더 부끄러웠다.

권형, 차좀 더 드릴까?’ 하면서 김 교수는 이렇게 말씀을 맺었다.

그냥 반가워서 하는 소립니다. 우리 국문과는 문학연구를 중시하니까 문단비평을 모두 우습게 여기지요. 그런데 권형이 잡지에 글을 쓰니 너무 반가웠어요. 나도 십여 년 전에 권형처럼 월평을 시작했을 때 꼼꼼하게 읽고 분석하고 따지면서.... 그런데 일반 독자들은 거의 그렇게 쓴 월평을 안 읽어요. 그래서 방법을 바꾸었지요.’

나는 지금도 그 첫 만남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김윤식 교수의 월평은 그 특유의 작가에게 말 걸기로 유명하다. 작가들과 맞서서 작가들을 긴장시킨다. 자기네 글을 꿰뚫어 보는 눈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언제나 문단의 현장에서 글쓰기의 감각을 유지해온 비평가는 김윤식 교수밖에 없다.

 

2

 

내가 서울대학교 전임교수가 된 것은 1981년이다. 나이 서른셋이었다. 국문학과는 물론이고 인문대학 전체에서도 연치가 가장 낮았다. 나는 늘 긴장하고 살았다. 나를 대학 입학시절부터 가르치신 선생님들이 많았으니 당연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김윤식 교수는 강의가 있는 날에만 주로 학교에 나왔다. 학과의 교수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학과 운영에 대한 의견을 내는 적도 없었다. 모든 일은 학과장에게 위임하고 가끔 궁금한 일이 생기면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권형, 여기 오소. 차 한 잔 마시고 가소.’ 이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나는 한 번도 다른 일을 핑계대지 않았다. 김 교수의 연구실은 온통 사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작은 책상에 늘 원고지를 펼쳐두고 책을 읽고 있었다. 연구실에는 소파도 없었고 나무 걸상 두어 개가 있을 뿐이었다.

김윤식 교수가 반드시 참가하는 학과의 행사는 석사 박사 학위논문 예비 발표회였다. 대학원 과정에서 일년에 두 차례씩 봄과 가을에 치르는 논문발표회는 엄숙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모두가 긴장해 있었다. 학과의 모든 전공 교수가 나와 앉아 있는 자리인데다가 대학원 과정을 이수중인 학생들은 모두 참관해야만 하였다. 학위 과정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이 연구한 과제의 결과를 처음으로 바깥에 소개하게 되니 발표자들은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할 정도였다. 발표자에게는 석사 논문의 경우 30분 정도 발표 시간이 주어진다. 박사 논문인 경우는 45분 정도로 길게 발표를 해야 했다. 발표가 끝나면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질의와 강평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도교수가 논문 준비 과정에서 생겼던 일도 소개하고 논문의 주안점도 보충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이 논문 예비 발표에서 발표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교수들의 질문과 강평이었는데, 특히 김윤식 교수를 무서워하였다. 김 교수가 발표 논문에 대해 어떤 부분을 지적하면서 질문을 하는 경우는 그 논문이 비교적 잘 준비되었을 때였다. 김 교수는 어떤 부분을 왜 그렇게 설명했는지도 묻고 또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서양의 어떤 이론서를 들면서 그 책을 읽었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런 질문을 받는 발표자는 안도해도 좋았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하지 않고 김 교수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다그치기도 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이야기를 지금 어디서 늘어놓고 있느냐?’ ‘이렇게 자기 글에 자신이 없는데 무슨 공부를 한다고 나대느냐?’ ‘당장 집어치워라.’ 하고 불호령을 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호되게 야단을 치고 김 교수는 늘 학문하는 자세를 강조했고, 학문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내세웠다. 그 자리에서 야단을 맞은 학생들은 그날 밤 자기들끼리 모이는 뒤풀이에서 폭음을 하며 괴로워했다는 이야기도 나는 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김 교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 엄정하신 분이 발표회에서 야단을 친 학생을 그대로 물리치지 않고 다시 연구실로 불러 논문의 문제점을 소상하게 지적해 주었고, 당신이 보던 책을 꺼내어 주고는 한번 자세히 읽어보라고 건네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도 있다. 학위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은 김 교수의 이 투박하면서 때로는 자상한 가르침에 커다란 감화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 논문의 내용에 대해 김윤식 교수가 질문을 해왔다는 사실을 늘 자랑처럼 기억하려 하였다.

 

3

 

김윤식 교수가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고 자가용차를 몰고 학교로 출근한 것은 한동안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 사이에서도 화제거리였다.

어느 날 오후였다. 김 교수가 예의 그 낮은 목소리로 오소. 차 한 잔 하고 가소.’하며 전화를 하였다. 내가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방안에 결명자 끓이는 냄새가 가득했다.

여기.’

김 교수는 내게 결명자 차를 한 컵 따라준다.

이게 눈에 좋다네요. 눈을 맑게 한다구 권해서.’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잣말처럼 눈은 평생 잘 간수하고 사용해야 하니까.’ 하면서 결명자 차를 마셨다. 그리고는 그날 아침 출근길에 일어났던 황당한 자동차 사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에 내 차가 운전 중에 고장을 일으켰어요.’

나는 깜짝 놀라서 어디 다치신 곳을 없느냐고 물었고 차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김 교수는 , ...’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서는 아무 일이 없이 잘 나왔어요. 큰길로 나섰는데 오늘은 차들이 많아서 한강다리로 들어서는 데 꽤 시간이 걸렸지요. 막 다리 위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차가 이상해집디다. 앞 유리창에 검정 막대기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데 도통 멈추지를 않아요. 나는 놀라서 다리를 다 건너와서는 길가에 차를 세웠지요. 그리고 시동을 끄니까 그 막대기가 턱하니 유리창 위에 걸터 올라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나는 무슨 말씀인지 대충 짐작을 했지만 뒷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공중전화로 보험회사에 연락을 했어요. 당장 와서 차를 손봐달라고. 거의 40분 정도가 지나서 보험회사가 보낸 수리기사가 차를 몰고 나타났어요. 무슨 고장이냐고 물어서 내가 설명을 했더니 시동을 한 번 걸더군요. 그리고 무언가를 손댄 것 같은데 그 유리창 위의 막대기가 두어번 움직이다가 멎어버리는 겁니다. 수리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자동차의 본넷을 들어 올려 보고는 이내 쿵 하고 내리닫아요. 그리고는 다 고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지요. 정말 아무 문제없느냐고. 기사는 젊은 녀석인데 픽 한번 웃고는 날 보고 운전 조심하라면서 돌아갑디다.’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차 앞유리창의 와이퍼에 대해 내가 설명을 하니 권형이 차에 대해서도 잘 아시네.’ 하고 웃었다. 그 뒤 김 교수는 차를 오랫동안 몰고 다니지는 않았다. 가끔 학교에 나오는 경우에도 택시를 이용하거나 사모님이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아무래도 두 다리로 걷는 것이 편해요.’ 하시는 것이었다.

 

4

 

국문학과에서는 해마다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로 학술답사를 떠난다. 여간해서 그런 행사에 나서지 않던 김윤식 교수가 충청도 진천 조명희의 고향과 아산 이기영의 고향을 찾아 가는 답사에 참여했다. 내가 답사반 지도교수로 인솔 책임자가 되었는데, 학부생들도 몇 명이 자발적으로 답사에 참가했다.

진천 벽암리에서 조명희와 조벽암의 친지들을 만나고 생가터를 돌아보는 동안 김윤식 교수는 대학원생들에게 조명희의 소련에서의 죽음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모두가 점심을 먹은 뒤 읍내 시장 옆의 빈터에 세워둔 버스 있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김 교수는 언제나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았지만 아무도 그 곁에 동석하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김 교수를 어려워하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버스에 올라탔는데 키가 작은 학부 여학생 하나가 맨 마지막으로 골목어구의 상점에서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들고 달려왔다. 나는 김 교수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여학생이 차에 오르자 갑자기 앞자리의 김 교수가 여학생을 손으로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그거 나 하나 주소.’ 하는 것이었다. 여학생이 멈칫하다가는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김 교수에게 드린다. 김 교수는 뜻밖에도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는 그 여학생에게 옆 자리에 앉도록 권하는 것이다. 그 학생이 뒤쪽으로 가겠다고 하였지만 나도 눈짓으로 그냥 그 자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김 교수가 그 학생을 곁에 앉게 한 후 주고받는 대화를 나는 유심히 엿들었다

이게 그렇게 맛이 있나?’

예 엄청 시원하고 맛있어요. 제가 봉지를 뜯어드릴까요?’

아니야 내가 뜯지.’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은 대화가 끊겼다. 버스가 다음 행선지를 향해 출발을 했다.

김 교수가 학생에게 묻는 말이 들렸다.

거기 무어가 들었나?’

학생이 한쪽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손지갑이었다. 학생은 학생증, 주민등록증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 교수가 그 지갑을 이리 달라고 한다. 학생이 별거 없는데요 하면서 지갑을 펼쳤다. 천원짜리 몇 장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뒷자리의 내 눈에도 들어 왔다. 김 교수가 그 지갑을 받아 들더니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돈 만원짜리 두 장이었다. 김 교수는 그 돈을 학생의 천원 짜리 몇 장 사이에 끼워 넣고는 지갑을 학생에게 돌려준다.

학생이 놀라면서 말을 못하고 있자 김 교수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이스크림 값을 주는 거야. 그냥 받아두어.’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5

 

김윤식 교수가 서울대학교를 퇴임하던 해였다. 곧 연구실을 치우겠다며 내게 전화를 하였다. 그날 나는 김 교수와 함께 교수식당에서 점심을 하고는 같이 교정을 걸었다. 김 교수는 생전 묻지 않는 이야기들을 내게 물었다. 아이들 잘 공부하고 있느냐, 마나님(내 아내)은 건강하냐, 고향인 충청도에는 자주 내려가느냐, 등등.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려드렸다. 이야기 끝마다 아 그렇구만.’ 하면서 김 교수는 내 이야기를 받았다.

나도 김 교수께 퇴임 후 어떻게 소일하시겠냐고 물었다. 김 교수는 고개를 들어 관악의 정상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요즘 아주 운동을 많이 합니다. 같이 산에 오르던 출판사 사장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산에 가는 것은 끝내고 요새는 한강변을 걷지요. 매일 두어 시간은 족히 걷는데 아주 기분이 좋아요. 내 몸 간수는 철저히 하려고. 우리집 할망구가 건강이 좋지 않으니 내가 돌보아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걷지요.’

나는 한강변 산책이 아주 좋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이제는 좀 쉬어가면서 글을 쓰시라고 권했다. 뒷사람들도 좀 할 일을 남겨두시라고. 김 교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도서관 뒷길을 돌아 버들골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학생회관의 식당 구석에 차려놓은 커피숍에 들렀다.

이 집 커피가 그래도 맛이 있어.’

김 교수는 커피잔을 들고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는 내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좋은 학교에서 똑똑한 학생들과 평생을 살았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읽고 싶은 책을 다 읽고, 쓰고 싶은 글을 다 썼다고 생각해요......하지만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권형은 그런 거 못 느끼시오? 여기 관악의 우리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 이제 그만 두려니까 이 자리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성격이 못되어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평생을 집에서 학교만 왔다갔다 했는데...... 그래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받아주고 나를 인정해준 곳은 이곳 학교뿐이요...... 나는 작가들과 맞서려고 참 품을 많이 팔았는데...... 내가 쓴 글은 모두 발로 쓴 것이지요.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뒤졌으니..... 요즘 학생들은 너무 똑똑해서...... 아무도 이런 공부는 안 하려고 하니 걱정이요.’

나는 이런 말씀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제 학계의 후배들이 그리고 제자들이 모두 자기네 몫을 다하고 있으니 걱정마시라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그저 앞으로 건강 잘 챙기셔야 한다고만 했을 뿐이다.

 

6

 

김 윤식 교수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후학들을 언제나 겁먹게 만들었던 어른이 가셨다.

문단 한복판에 서 계시던 평론가, 글을 읽고 쓰는 자세에 대해 늘 고심하던 큰 학자, 그리고 우리들 모두에게 선생님이셨던 김윤식 교수님을 다시는 뵐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식의 회고담을 선생님의 영전에 올려야 한다는 것도 나는 가슴이 아프다. 우리 문단에 이렇게 열정적인 비평가가 없었는데 앞으로 김윤식 교수님과 같은 문학연구가를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떠나신 자리가 더욱 허전하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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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정신적 지주로 영원히 남게 된 최인훈 선생의 소설

 

 

1

 

최인훈 선생께서 세상을 뜨셨다.

한국문단의 큰 어른을 이제는 다시 뵈올 수 없게 되었다.

 

최인훈 선생은 1959년 단편소설 GREY 구락부 전말기(1959)로 등단했다. 이 작품은 스토리의 전개가 모호하고 작품의 전편을 통하여 작가 특유의 관념이 짙게 배어나고 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자신의 내부세계에서 사물과 사상을 의식적으로 조작한다. 그들은 행동이 없고 관조만 있는 자기응시의 인간들이다. 철저한 무위를 행동강령으로 삼고 있는 회색의 집단을 통해 작가는 삶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젊은이들의 우울과 방황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GREY 구락부 전말기는 관념소설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한 최인훈 문학의 원점에 해당한다. 이 작품에서 부조되고 있는 관념이 역사의식과 현실감각을 확보하면서 광장(1961), 구운몽(1962), 크리스마스 캐럴(1963), 회색인(1964), 총독의 소리(1967),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69) 등으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인훈 선생의 소설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작가 자신이 그의 소설을 통해 다양한 기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정치적 상상력이다. 최인훈 선생의 소설은 허구적 자아의 형상과 경험적 자아로서의 작가가 특이하게 대치함으로써 아이러니의 국면을 연출하게 되고, 그러한 상황적 아이러니가 작가의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암시하게 된다. 특히 그의 소설적 공간이 분단 상황이라는 정치적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는 점은 이러한 특성을 암시해 주는 근거가 된다고 할 것이다. 그는 분단 상황과 거기서 빚어진 정치 현실의 문제성을 특이한 알레고리와 패러디의 방식을 통해 소설적으로 구체화시켜 놓고 있다. 그의 정치적 상상력은 삶의 현실과 모든 국면이 정치적인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특히 최인훈 선생은 민족 분단이라는 당대 현실의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정치적인 것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는 분단 상황에서 야기된 이데올로기의 편향성과 반공 반일 노선의 이율배반적 속성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하나의 새로운 알레고리를 창안하고 있다.

 

2

 

최인훈 선생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주목되고 있는 작품이 광장(1961)이다. 이 소설은 한국의 민족분단을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젊은 철학도이다. 그가 해방 공간의 혼란 속에서 감행하게 되는 가치 선택을 위한 지적 모험이 이 소설의 참주제와 연결된다. 주인공은 서울에서 공부하며 이상을 키워나가지만, 아버지가 북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임이 판명되면서 경찰의 혹독한 취조를 받게 된다.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게 관념적 상태에서만 의식하고 있던 남북의 분단과 이념적 갈등이 현실적인 삶의 문제로 대두되어 주인공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가하게 된다. 그는 남한 사회가 자유당 정권의 부조리와 사회적 부패로 혼란에 빠져 있으며, 개인적으로 누리는 행복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사회 풍조로 인하여 진정한 공동체의 삶을 이룰 수 없는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음을 냉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자신이 꿈꾸던 참다운 삶의 광장을 찾아 배편으로 북한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주인공은 북한에서도 사회주의가 내세우는 공식적인 명령과 그에 대한 복종만이 있을 뿐임을 알게 된다. 그가 그리던 진정한 삶의 광장은 북에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작품의 주인공은 남과 북을 놓고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자신이 꿈꾸었던 이념을 선택하고자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삶의 참다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사고로 인하여 주인공은 이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남과 북을 모두 버리고 제3국을 선택한다. 물론 이 같은 선택은 자기 주체에 의해 삶의 가치를 확립할 수없는 시대적인 강요로 이루어진 선택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가 꿈꾸는 진정한 삶의 광장이 소설 속에서 바다갈매기의 심상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시대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북쪽의 사회구조가 갖고 있는 폐쇄성과 집단의식의 강제성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남쪽의 사회적 불균형과 방일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제삼자적인 입장에서 볼 때 남과 북 어느 쪽도 진정한 인간의 삶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이 이에서 비롯된다. 이 소설은 결말에서 주인공의 자살을 암시함으로써 이념선택의 기로에서 개인의 정신적 지향의 한계를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적 구도를 통해 완강하게 고정되고 있는 분단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장편소설광장의 연장선상에서 대비적으로 그려낸 소설적 개성은 회색인(1964)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이 소설은 광장과는 달리 행위와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의 구성보다는 주인공 내적 독백과 관념적 사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작품의 배경은 4·19혁명 직전의 한국사회이며,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기점으로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하는 한국 정치사의 분기점을 시간의 축으로 삼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국전쟁 당시 고향을 북한에 두고 월남한 독고 준이라는 지식인 청년이다. 자기 존재의 의미와 그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독고 준은 남한 사회를 뒤덮고 있는 분단 상황의 고통과 편향된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서 현실의 삶에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한 채 방황한다. 회색인의 주인공은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소극적이며 회의적이다. 특히 월남해서 살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이와 같은 인물의 설정은 남과 북의 현실을 모두 거부한 채 제3국으로의 도피를 택했던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의 경우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때때로 떠오르는 북한 땅 고향에서의 유년시절을 뿌리치지 못한다. 월남한 아버지로 인해 어린 나이에도 주변으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되었던 그는 자신이 서 있는 남한의 현실 속에서도 언제나 소외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뿌리 뽑힌 존재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독고 준이 보여주는 현실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운명적인 삶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사색을 통해 어느 정도 방향성을 드러낸다. 행동과 실천보다 깊은 고뇌와 지적인 사색을 통해 문제의 궁극을 찾아가고자 하는 이런 태도는 작가 최인훈 선생이 창안해낸 하나의 관념적 인간형의 존재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3

 

최인훈 선생이 자신의 소설쓰기에서 관념소설로서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 발전시키면서 새롭게 발견한 형태가 연작소설 총독의 소리(1967)이다. 총독의 소리는 여러 편의 편의 작품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연작의 형식에서 중시하고 있는 연작성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서사의 기본요소가 되는 행위구조가 결여되어 있어서 일관된 흐름이나 발전을 보여주는 잘 짜인 하나의 이야기 형태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가상적인 인물로서 총독의 존재만이 설정되어 있고, 그의 모습은 일련의 연설 형태가 되어 버린 담화의 내용 속에 감춰져 있을 뿐이다. 주동적인 인물이 벌이는 행위가 없으므로 사건도 없고, 사건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뒷받침해 주는 배경도 상정할 수 없다. 오직 담화의 상황 자체만이 작품 내적인 구조를 지탱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상황성의 반복만이 연작으로서의 성격을 규정해 주고 있다.

총독의 소리는 독특한 어조로 이어지는 담화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담화는 화자(話者)와 청자(聽者)가 있고, 담화의 내용을 이루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메시지의 내적 상황과 외부적인 국면을 설정하기 마련이다. 연작소설 총독의 소리에서 각 작품 형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담화의 형식은 그 자체가 다분히 사회적인 성격을 띤다. 누구의 담화이며, 누구를 대상으로 하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독특한 담화 공간을 상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담화의 형식은 화자와 청자 사이의 일련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그 용법과 의미가 규정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언어형식 자체가 가상된 현실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담화 공간으로서의 상황 설정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화자의 존재는 담화의 목소리 속에 감춰져 있는 총독이다. 한국 내에 비밀조직인 조선총독부 지하부가 있고, 이 비밀단체가 비밀방송을 통해 총독의 담화 내용을 내보내는 것으로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해방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조선총독부 지하부라는 조직의 존재를 내세운 것 자체가 다분히 풍자적인 것이지만, 총독의 담화내용이 역설적으로 한국의 현실 정치와 연관된 여러 문제를 거론하는 것도 의도적인 고안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 활용하고 있는 담호의 방식이 청자의 입장을 거의 무제한적인 불특정 다수의 청중으로 삼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작품의 성패가 바로 그 청중들의 반응에 의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허구적 장치는 작가 자신이 현실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정치적 이념과 태도를 위장하기 위한 하나의 수사적 고안이다. 우선 작품 내적인 상황 설정에서 중시되는 조선총독부 지하부와 총독의 존재 설정에서부터 그 정치적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일본은 한국 근대사의 왜곡된 전개를 획책한 제국주의의 부정적인 표상이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그 책임자인 총독도 마찬가지 존재였음은 물론이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존재를 한일관계가 타결된 1960년대 후반 한국의 정치 현실 속에 가상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허구적인 장치를 통해 현실정치의 모순을 폭로하고 희화화하고 있으며, 현실의 문제성을 역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1960년대 후반의 한국 정치 상황을 뒤집어보고 있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는 귀축 영미(鬼畜英美)’로 대변되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 ‘러시아로 지칭되고 있는 국제공산주의의 야욕,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존재를 다시 재현시킨 일본의 성장 등을 국제적인 역학관계로 설정한다. 이 가운데에서 논의의 중심에는 물론 분단 한국의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작품 내적인 구조로 볼 때, 총독의 소리는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 총독의 담화로 꾸며져 있으므로, 표면적인 일본의 입장을 중심으로 그 내용이 채워진다. 물론 이러한 상황 설정 자체가 하나의 역설이지만, 한일회담 이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의 확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설득력 있는 고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의 입장이라는 가정된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경쟁관계에 놓여 있는 미국이나 소련에 대한 언급이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결국 작가 최인훈 선생은 이같은 당대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 신식민주의의 도래를 우려하고 있다. 분단의 현실 속에서 추진하고 있는 근대화 운동이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적 인식 아래에서, 그는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의 확대를 비판하는 총독의 소리를 다시쓰고 있는 것이다. 총독의 소리는 결국 그 문학적 성과를 작가 자신의 정치적 상상력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형식적 요건이나 미학적인 요건이 모두 정치적 효과를 위한 고안으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속성은 비역사적 추상화의 방법을 뜻하는 관념이라는 용어만으로는 규정하기 힘들다. 오히려 당대 현실 속에서 이 작품에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의 지향이 갖는 정치적인 효과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지목해야 할 것은 총독의 소리가 빚어내는 새로운 정치 담론의 공간이 1960년대 후반기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새로운 이념의 광장으로 든든하게 자리잡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지니고 있는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태도가 엄숙주의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응할 만한 유연성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총독의 소리는 시대상황의 위기를 지적하는 다급한 목소리의 문학으로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이 신식민주의의 도래에 대응할 만한 단단한 이념의 틀을 제대로 정치적 상상력 안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내지 못한 것은 당대 정치의 이념적 고정성과 폐쇄성에서 기인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최인훈 선생이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서사장르 대신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1976), 달아 달아 밝은 달아(1978) 등의 극 양식을 새롭게 시험한 것은 관념의 늪에 빠져든 자신의 문학세계를 전환시켜 보고자 했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최인훈 선생의 작가적 고뇌는 그 정치적 상상력의 폭과 깊이보다 더 아득하였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생은 떠나셨지만 한국문학의 정신적 지주로 최인훈 문학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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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의 격조 혹은 파격 

 

1

 

최남선이 1920년대 중반에 주창했던 시조부흥은 가람 이병기를 통해 비로소 현대시조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실질적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병기에 의해 시조의 시적 혁신과 그 창작이 가능해졌고 시조에 대한 이론적 탐구와 그 시학의 원리가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병기는 시조란 무엇인가(1926), 시조와 그 연구(1928), 시조 원류론(1929) 등을 통해 시조문학의 본령을 깊이 있게 논의하였고, 시조는 혁신하자(1932)와 같은 글에서 시조를 하나의 시 형식으로 새롭게 인식하면서 이념적인 도그마에서 벗어나 시조 창작의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의 창작 시조집 󰡔가람시조집󰡕(1939)은 현대시조의 가장 주목되는 성과로 손꼽히고 있다.

이병기의 시조론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시조의 시적 형식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시조의 시적 형식 문제는 오늘의 현대시조가 왜 시조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시조는 그것이 창곡으로 가창되었던 시대에도 3장의 음악적 형식에 묶여 있었고, 시로서 읽혀지면서도 시적 형식으로서의 3장 분장의 형식을 고수하고 있다. 시조가 지니고 있는 시적 특성은 이 불변의 3장 형식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시조에 대한 시학적 해명 또한 이러한 시적 형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조의 형식은 정형인 것과 고전적인 것이다. 하나 고전도 고전 나름이요 정형도 정형 나름이지 반듯이 정형이라고 하여 고전을 덮어놓고 다 버려야 할 것은 아니다. 시조는 정형이며 고전적이면서도 꼭 있어야 할 까닭은, 도리어 그 정형과 그 고전적에 있다. 한문이나 영어와 같은 외국의 문학을 맛보는 우리로서, 그래도 조선어문학의 맛을 보자면 무엇이 있나. 한시(漢詩)나 영시(英詩)처럼 발달은 못되었다 하드라도, 적어도 조선말로써 조선말답게 적은 것이며 조선말로서의 목숨과 넋이 있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조선말에 쓰인 전형과 궤범(軌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것을 보고 일일이 그대로 모방을 하거나 인용을 하거나 할 건 아니라도 거기에서 무슨 전통이나 암시를 얻을 것 아닌가. 이것이 과연 우리들과는 남다른 깊은 관계가 있는 바이다.

-이병기, 시조는 혁신하자(1932)

 

앞의 글에서 이병기는 시조의 시적 형식을 정형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에서 찾고 있다. 시조라는 시 형식의 본질적인 특성은 3장의 구성 원리에서 찾아진다. 초장, 중장, 종장으로 구분되던 고시조의 형식은 엄격하게 음악적 형식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시조는 이와 다르다. 현대시조는 음악적인 형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시적 구성 원리로서의 3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미 고정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형식에 따라 3장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시적 형식으로서 3장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조의 3장 분장 형식은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어떤 제약을 가하기 위한 외형적인 틀이 아니다. 그것이 만일 말하고자하는 것에 대해 한계를 정하고 제약을 가하는 일종의 형식적 규제 장치라면, 그것은 단조로운 행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고도의 미의식을 구현하는 시적 형식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병기가 시조의 시적 속성을 규정해 주는 요소로서 그 정형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에서 찾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시조는 고정적 형식의 균제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이 형식적 특징은 가람 시조가 추구하고 있는 시정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시조가 추구하고 있는 시적 기품과 격조가 거기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조가 하나의 문학적 형식으로 다시 창조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녀온 외형의 균제라는 형식적 특성만을 고집하면서 시인의 개인적인 시 의식이라든지 새로운 시대감각을 외면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시조가 지녀왔던 특유의 기품이나 형태적 전아성을 포기한다면 시조는 결국 파괴되고 만다. 시조는 이러한 두 가지의 조건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그 시적 가능성을 확고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병기가 주목하고 있는 점도 바로 여기 있다.

 

2

 

이병기의 시조는 연작형식의 시적 정착이라는 양식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병기의 연작시조는 단형의 평시조를 중첩시켜 시적 의미를 확대시켜 놓고자 하는 형식적 실험의 소산이다. 이것은 시조의 단형적 형태가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와 상통한다. 이미 연시조의 형태는 조선시대 이퇴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나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와 같은 작품을 통해 그 시적 가능성을 입증받았던 형식이다. 최남선이 개화 계몽 시대에 새로운 시작의 실험을 행하면서 연시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시적 형식에 대한 배려보다는 그 형식에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의 풍부성을 감당할 수 있는 시적 형식의 추구에 더 큰 관심이 있었던 때문으로 이해된다.

 

다시 옮겨심어 분에 두고 보는 파초(芭蕉)

설레는 눈보라는 창문을 치건마는

제먼저 봄인 양하고 새움 돋아 나온다

 

청동(靑銅) 화로 하나 앞에다 놓아 두고

파초(芭蕉)를 돌아보다 가만히 누웠더니

꿈에도 따듯한 내 고향을 헤매이고 말았다

 

-파초(芭蕉)

 

이병기의 연시조 파초는 파초 가꾸기의 일상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작품에서는 파초의 널따란 잎을 볼 수 없다. 겨울나기를 위해 잎과 줄기를 잘라내고 대궁만 남겨 뿌리를 화분에 심어두었기 때문이다. 파초는 봄부터 가을까지 푸른 잎이 타원형으로 크게 자란다. 그 잎의 싱그러움을 사랑하여 예전부터 관상용으로 많이 가꾼다. 옛 그림에도 파초도(芭蕉圖)’가 많다. 원래 중국 남방 지역 온난한 땅에서 자라는 다년초로 우리나라로 옮겨진 귀화식물(歸化植物)’이다. 겨울 추위를 지낼 수 없기 때문에 밖에 그대로 두면 뿌리가 얼어 죽는다. 그러므로 늦가을에 이를 캐내어 화분에 심어 실내로 옮겨 놓아야 한다. 파초 1연에서 초장인 다시 옮겨 심어 분에 두고 보는 파초는 파초의 겨울나기를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늦가을까지 넓고 푸른 잎을 자랑하던 파초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줄기와 잎이 모든 잘린 채 화분에 옮겨 심은 상태로 실내에 놓여 있다. 중장에서는 바깥의 눈보라를 보여준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찬 겨울의 험한 날씨를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종장에서 시적 분위기가 전환된다. ‘제 먼저 봄인 양하고 새움 돋아나온다.’ 시조의 격식(3.5.4.3)을 지키면서 표현의 변화를 살린다. 놀랍게도 실내에 들여다 놓은 파초의 대궁에서 새 움이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 파초의 넓은 잎이 자랑하는 기품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 작은 새싹을 통해 생명이 움트고 있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재를 발견하고 거기에 새로운 감각을 부여하는 솜씨가 놀랍다. 2연으로 이어지는 시상의 흐름도 흥미롭다. 바깥의 추운 날씨를 다시 강조하는 뜻으로 청동화로가 등장한다. 시적 화자는 파초 화분을 살피다가 화로 옆에 누워 잠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 종장에서 파초와 시적 화자가 그대로 하나가 되어 따뜻한 고향을 헤매게 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이병기의 파초는 연작시조라는 시조의 형태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긴장과 이완, 통합과 균형의 미를 자랑한다. 작품의 전체적인 짜임새를 연작의 기법이라는 차원에서 좀더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시적 주제의 형상화 과정이 예사롭지 않은 긴장을 내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연작의 형식은 시조의 특성으로 자리잡은 형태적인 요소로서 단형시조의 시적 확대를 의미한다. 시조가 담아야 하는 시적 의미 내용이 그만큼 다양하고 포괄적인 것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외형적으로 각각 독립된 두 편의 평시조를 병렬적으로 연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텍스트의 구조 자체가 통합된 하나의 작품을 위해 견고하게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조에서 연작을 통한 형식적인 확장에 전체적인 균형을 부여하며 시적 긴장을 이끌어 가는 것은 형식적 고안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시적 주제의 응축과 그 확산의 과정을 전체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내적인 질서에 의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형식적인 실험을 통해 개방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연시조 형식의 창조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3

 

이병기의 시조에서 발견하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시조의 형태적 고정성을 벗어나기 위해 파격을 추구했던 사설시조에 대한 실험이다. 시조의 장르 변화 과정에서 볼 때, 평시조의 극복 양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사설시조의 형태적 특성이 이병기의 시조에 와서도 발전적으로 계승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되는 현상이다. 모든 예술의 형태는 그 독자적인 생명력을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시대적 위상에 조응하기 마련이다. 사설시조의 등장은 조선 후기 서민의식의 성장과 새로운 미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사설시조에서 볼 수 있는 고정적인 율격 파괴와 산문화 경향은 조선 후기 사회 서민층의 미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게 보통이다. 사설시조는 비교적 고정적인 율격을 지켜 나가려고 하는 부분(초장, 그리고 종장의 첫머리)과 고정적인 율격을 파괴하고자 하는 부분(중장, 그리고 종장의 첫머리를 제외한 부분)이 서로 결합되면서 형식상의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설시조의 특성에 이병기는 어떤 방식으로 현대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는지 다음의 두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해만 설핏하면 우는 풀벌레 그 밤을 다하도록 울고 운다

가까이 멀리 예서제서 쌍져 울다 외로 울다 연달아 울다 뚝 그쳤다 다시 운다 그 소리 단조하고 같은 양 해도 자세 들으면 이놈의 소리 저놈의 소리 다 다르구나

남몰래 겨우는 시름 누워도 잠 아니 올 때 이런 소리도 없었은들 내 또한 어이하리

-풀벌레

 

(2)

 

날마다 날마다 해만 어슬어슬 지면 종로판에서 싸구려 싸구려 소리 나누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갓쓴 이 벙거지쓴 이 쪽진 이 깎은 이 어중이 떠중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엉기정기 흥성스럽게 오락가락한다 높드란 간판 달은 납작한 기와집 퀘퀘히 쌓인 먼지 속에 묵은 갓망건 족두리 청홍실붙이 어릿가게 여중가리 양화 왜화붙이 썩은 비웃 쩌른 굴비 무른 굴비 무른 과일 시든 푸성귀붙이 십전 이십전 싸구려 싸구려 부르나니 밤이 깊도록 목이 메이도록 저 남산 골목에 우뚝우뚝 솟은 새 집들을 보라 몇해 전 조고마한 가게들 아니더냐 어찌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

그나마 찬바람만 나면 군밤 장사로 옮기려 하느냐

- 야시(夜市)

 

앞에 인용한 이병기의 풀벌레 야시전형적인 사설시조의 형태를 보여준다. 풀벌레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면 시적 텍스트에서 이미 초장, 중장, 종장을 명확하게 구분해 놓고 있다. 초장은 날이 저물고 울기 시작하는 풀벌레 소리를 시상의 발단으로 제시한다. ‘해만 설핏하면이라는 말은 해가 저물녘에 사방이 어둑해지는 상황을 말한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밤이 다하도록 그치지 않는다. 사방이 소란스럽다면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을 리 없다. 고요하고 적막한 밤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상의 흐름을 도와주는 시간적 배경과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중장은 가까이 멀리에서부터 다 다르구나까지에 해당한다. 중장에서 사설시조의 서술성의 묘미를 최대한 살려낸다. 시적 진술에는 대조, 열거, 반복, 지속, 영탄의 방법이 모두 동원된다. 풀벌레 소리를 때로는 설명하고 때로는 묘사하면서 의 그 특징적 인상을 잡아내어 다채롭게 들려준다. 풀벌레 소리의 거리감과 그것이 들려오는 장소(가까이 멀리 예서제서)를 먼저 헤아리고 그 소리의 특징(쌍져 울다 외로 울다 연달아 울다 뚝 그쳤다 다시 운다)을 가늠한다. 저절로 음악적 가락이 살아난다. 이 과정에서 밤의 고요와 적막이 깨진다. 풀벌레들이 들려주는 합창의 한가운데에 시적 화자가 들어서 있다. 이 작품의 시적 주제가 암시되는 부분은 종장이다. ‘남몰래 / 겨우는 시름에서 3음절과 5음절의 음수를 지킴으로써 시상의 전환이 이 부분에서부터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시적 화자는 밤에 홀로 자리에 누워있다. 자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고달픈 세상살이에 혼자서 시름이 없지 않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에 들지 못한다. 밤의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 바로 풀벌레 소리다. 화자의 마음속의 시름도 그 소리만큼 많을 것인데 바깥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화자의 시름에 더해지고 어지러운 머리에 가득해진다. 세상의 온갖 잡사(雜事)의 시름이 풀벌레 소리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이 풀벌레 소리를 시조의 시적 형식에 담아 사설조로 풀어낸다. 이 파격의 사설이 하나의 시적 풍경을 만들어내고 실감의 정서를 자아낸다. 이병기가 아니고서는 흉내내기 어려운 시적 실험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야시는 일상적 생활 감정을 시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전통적인 사설시조가 보여주었던 풍자와 야유와 해학의 장면과 그 느낌까지도 그대로 살려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서울 장안의 명물이 된 야시장의 풍물 속에 일제 강점기의 삶의 현실과 그 모순에 대한 풍자와 조소까지 곁들여 놓고 있기 때문이다. 초장은 날마다 날마다 해만 어슬어슬 지면 종로 판에서 싸구려 싸구려 소리 나누나가 된다. 평시조의 초장에 요구되는 3.4.3.4라는 음수율의 고정된 격식에 약간의 파격을 가하고 있다. 야시장의 시공간적 배경을 그려내면서 싸구려라는 장사치들의 목청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중장은 시장에 구경 나온 사람들과 장사꾼들의 행색, 그리고 가게에 늘려 잇는 물건들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사설시조에서 사설을 개방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부분이 중장이다. 여기서 사설시조의 열거와 반복, 대조와 비교, 해학과 비판이 살아나야 한다. 먼저 시장거리의 사람들의 행색이다. 갓 쓴 사람과 벙거지를 쓴 사람, 머리에 쪽을 진 아녀자와 머리를 단발한 사람, 이런 저런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오고간다. 앞뒤 구절을 서로 짝 짓고 맞세워 자연스럽게 리듬이 생기도 가락이 살아난다. 야시장에서 물건을 가게는 궁색하기 그지없다. 납작한 기와집에 간판만 높다랗게 달았다. 진열해 놓은 물건이라고는 먼지 쌓인 묵은 갓망건 족두리처럼 이제 한 시절 지나버린 것들이거나 청홍실붙이 어릿가게 여중가리 양화 왜화붙이처럼 싸구려 잡화들이다. ‘청홍실붙이 어릿가게는 여성들이 바느질이나 수놓기에 필요한 색실이나 바느질 도구들을 파는 가게이다. ‘여중가리 양화 왜화붙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잡동사니들인데, 물 건너온 양화(洋貨), 서양 물건들과 일본에서 들어온 자잘한 왜화(倭貨)붙이가 대부분이다. 식료품들도 진열되어 있다. ‘썩은 비웃 쩌른 굴비 무른 굴비 무른 과일 시든 푸성귀붙이가 대부분이다. 생선이라고는 다 상해가는 청어와 절인 굴비뿐이고 과일과 풍성귀는 이미 무르고 시들었다. 그래도 장사꾼들은 싸구려를 외친다. 이 작품의 종장은 저 남산 골목에 우뚝 우뚝 솟은 새 집들을 보라 몇 해 전 조고마한 가게들 아니더냐 어찌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 그나마 찬바람만 나면 군밤 장사로 옮기려 하느냐라는 시적 화자의 말로 끝맺는다. 종장의 첫 구절 저 남산 / 골목에 우뚝‘3.5’의 음수를 고정하는 사설시조의 형식적 틀을 그대로 지켜내고 있는 부분이다. 이 첫 구절에서 시상의 전환이 가능해지고 시적 주제의 결말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저 남산 골목 우뚝우뚝 솟은 집1920년대 서울의 주거지역과 상권의 형성을 알아보면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강점 후 서울의 남산 기슭은 모두 일본인들이 차지한다. 남산에 신사(神社)를 짓고 후암동 일대에는 일본 군대의 주둔지(지금의 미군기지)로 삼았으며, 남산 북쪽 기슭은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단장했다. 일본 총독이 사는 관저도 거기에 세웠으며 현재의 명동 충무로 일대를 일본인 상업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이 골짜기에 우뚝 우뚝 솟은 집이 꼴사납게 보였을 것은 분명하다. ‘어찌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라는 시적 화자의 말 속에는 같은 서울 장안이면서 번창하는 일본인들 구역과 여전히 가난에 찌들어 있는 우리네의 모습을 대조하면서 이 모순의 현실을 비아냥대는 조소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제 찬바람이 나면 이 초라하고도 궁색스런 야시장도 문을 닫는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4월부터 10월까지만 야시장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장사꾼들이 일터를 잃게 된다. 그러니 찬바람만 나면 군밤장사로 옮기려느냐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찬바람 부는 길거리로 내몰려 군밤장사로 살아야 하는 궁핍한 삶의 현실을 확인하는 셈이다.

야시는 일제 강점기 서울 종로에 개설된 야시장의 풍물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결코 시장거리의 흥성스런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시적 화자가 야시장의 초라한 행인들과 보잘 것 없고 궁색스런 가게의 물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이것을 장사꾼의 목이 메도록 외치는 소리 그대로 싸구려라고 옮겨 놓는다. 실제로 이 작품 속에 그려진 야시장에는 생동감이 없고 삶의 활력이 보이지는 않는다. 값나가는 물건이라는 것이 있을 턱이 없는 허름한 가게에는 보잘 것 없는 잡화들만 늘어놓고 있다. 썩은 청어, 무른 굴비는 전혀 신선할 리가 없고, 무른 과일, 시든 푸성귀는 초라한 삶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 초라한 야시장의 풍경을 더욱 초라하게 하는 것이 남산 골짝의 높이 솟은 새 집들이다. 서울 장안에서 남산골과 종로통이 부자와 빈자의 공간으로 구획되는 것은 우리네가 선택한 것은 아니다. 식민지 현실이 만들어낸 삶의 모순구조가 서울 장안을 그런 식으로 편 갈랐던 것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노리고 있는 것은 그런 현실의 음울(陰鬱)이 아닐까 생각된다.

 

4

이병기는 현대시조의 시적 형식에 감각성이라는 고도의 미의식을 부여함으로써 현대시조가 추구하는 시적 모더니티를 온전하게 구현하고 있다. 이병기의 시조는 전아한 기품을 자랑하고 있지만, 기실은 단조로움에 빠져들기 쉬운 시적 진술에 특유의 감각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병기는 시조를 통해 우리말의 음절량과 그 이음새에서 나타나는 말의 마디를 자연스럽게 변형시키면서 율격을 지켜나간다. 이것은 시조의 시적 형식이 어떤 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주는 요건이 된다. 난초와 같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절제된 감정과 언어의 감각을 이병기 시조의 미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1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 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볕이 발 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 난초 1. 2. 3. 4

난초는 흔히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일컫는다. 그 고결한 자태와 향취가 빼어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는 군자에 비유된다는 뜻이다. 정지용이나 김영랑도 난초를 노래했고, 신석정의 시에도 난초가 등장하는 것이 많다. 하지만 난초의 시인이라면 누구나 이병기를 손꼽는다. 평생을 시조 사랑으로 살았던 이병기는 그 곁에 늘 난초를 두고 아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했다는 고서 몇 권과 술 한 병, 그리고 난초 두서너 분이면 삼공(三公)이 부럽지 않다.’는 말에서 그가 얼마나 난초를 좋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병기는 난초의 고절한 기품에만 만족한 것이 아니다. 그는 난초에 섬세한 감각을 불어넣는다. 그가 그리는 난초는 군자니 고절이니 하여 관념화되어 버린 난초가 아니다. 이병기는 자연 속에서 호흡하고 꽃을 피우고 바람에 꺾이고 꽃이 떨어지는 살아 있는 난초를 찾아낸다. 그의 시조 속에서 난초는 살아 움직인다.

앞에 인용한 난초 1부터 난초 4를 보면 난초의 새로 꽃이 피어나고 새 잎이 자라다가 바람에 꺾이기도 하고 그윽한 향기를 흩어내는 모습 난초를 곁에 두고 아끼는 시적 화자의 심경을 함께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난초 1은 평시조의 형태로 난초의 개화를 간략하게 그려낸다.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라는 짤막한 구절에서 난초가 자라나 꽃을 피우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적당한 그늘과 바람이 난초를 키우는 것이다. 난초 2는 전체 2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연에서는 난초의 새 잎이 바람에 꺾이는 모습을 그려낸다. 차마 눈을 뜨고는 그 모습을 보기 힘들 정도로 난초의 모습이 애잔하다. 여기서 난초는 고결함이라든지 지조라든지 하는 관념과는 아무 상관없는 하나의 힘없는 풀꽃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난초에 깃들인 작은 생명의 움직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바람이 그 연한 새 잎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바람에 연한 새 잎이 꺾이는 모양에서 인생을 발견하다. 모진 바람과 힘없는 난초는 세파(世波)와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그 모습이 한없이 안쓰럽다. 눈을 뜨고 볼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2연에서는 난초의 향기를 그려낸다. 난초는 새 잎이 꺾인 채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는다. 그 향기에 취하여 잠시도 그 곁을 떠나기 어렵다. 난초 3는 비가 오는 날 다시 한 대 꽃이 피어나면서 향기를 전하여 우울한 시적 화자의 마음을 달래준다. 난초와 친화하는 자세를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난초를 향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이다.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라는 구절은 이미 시적 화자와 난초가 서로 하나로 동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난초 41연에서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라는 표현은 섬세한 언어 감각이 이루어낸 절묘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초장에서는 시각적 요소와 촉각적 요소를 결합했고, 중장은 자짓빛 대공하얀 꽃의 색채 감각이 선명하게 대조된다. 종장에서 이슬구슬의 비유는 더욱 정교하게 이미지를 배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감각적 묘사를 통해 난초는 그 섬세하게 피어나는 꽃임에도 전통적으로 덧씌워져 있던 가치와 이념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난다. 난초는 이렇게 연약하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향기롭고 기품 있는 꽃으로 다시 태어난다. 2연에서는 바로 이러한 난초의 아름다움에 더하여 그 정결한 모습을 그려놓고 있다. 이처럼 이병기는 시조의 시적 형식에 감각성이라는 고도의 미의식을 부여하고 있는데, 연시조 난초가 바로 그 구체적인 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시조는 그 형식적 특성 때문에 전통적으로 지켜온 전아한 기품만 가지고서는 시적 모더니티를 온전하게 구현하기 어렵다. 이병기는 고정된 시조의 시적 형식과 그 진술 방법에 특유의 감각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우리말의 음절량과 그 이음새에서 나타나는 말의 마디를 자연스럽게 변형시키면서 율격을 살려낸다. 이것은 시조의 시적 형식이 어떤 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주는 요건이 된다. 난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절제된 감정과 언어의 감각을 이병기 시조의 미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5

이병기는 현대시조가 연작성에만 안주함으로써 시적 형식의 압축미를 얻지 못한 채 기교와 수사에 얽매인 산문으로 기울고 있는 점을 문제삼아 시조의 격조를 강조한 바 있다. 이병기가 내세운 격조문제는 현대시조가 도달해야 하는 궁극의 지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조에서의 격조는 그 작자 자기의 감정으로 흘러나오는 리듬에서 생기며, 동시에 그 작품의 내용 의미와 조화되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딴 것이 되어버린다. 공교롭다 하여도 죽은 기교일 뿐이다. 그러므로 격조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의 감각성을 의미한다. ‘격조는 시조라는 단형의 시 형식에 동원되는 모든 단어에 생기를 넣어주며 사고와 감정의 기저에까지 침투하는 감각을 말한다. 이러한 상상력은 물론 언어와 그 의미를 통해서 작용하지만 시조의 경우 전통적 의식과 가장 현대화된 정신을 결합하는 것이다. 이병기는 격조를 내세움으로서 현대시조의 문학적 성격을 미학적 차원에서 새롭게 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병기의 현대시조가 시조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시적 감각을 살려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병기의 현대시조는 시조의 부흥이 아니라 새로운 시적 형식과 감각의 발견에 해당한다. 이것은 시조라는 형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고 그 주제에 적합한 새로운 시적 형식과 언어와 감각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발견이라는 말이 이 모든 과정 또는 수사적 방법을 지칭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발견으로서의 형식과 감각은 고정된 틀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적 형식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시적 대상을 새로운 언어로 사고하는 방법이며 과정이다. 이병기의 시조에서 확인되는 시적 형식과 그 감각은 일상어의 시적 활용이라는 점에서 현대시조의 새로운 탄생과 직결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체의 관념어를 배제하고 감각적인 일상어만으로 이루어진 이병기의 시조는 시적 언어의 감각적 구현에 있어서 현대시조가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궁극의 지점에 도달해 있는 셈이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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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 대사전

책머리에

 

1_문학 작품

1.

국문 시 / 일본어 시

2. 소설

3. 산문

 

2_미술 작품

1. 자화상 및 초상

2. 도안 및 삽화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표지 /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주소록 /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사인판 / 박태원 결혼식 피로연 방명록 휘호 / 잡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 / 아동잡지 가톨릭소년표지 도안 / 김기림 시집 기상도표지 도안 / 단편소설 날개삽화 1 / 단편소설 날개삽화 2 / 단편소설 동해삽화 1, 2

3. 박태원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연재 삽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연재 삽화 1~연재 삽화 28

 

3_작품 속의 인명 및 작품명

 

4_이상의 삶과 문학

이상의 출생 / 이상의 성장 과정 / 경성고등공업학교 시절 /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 다방 제비시절 / ‘구인회시절 /동경 시절

 

부록_이상의 사진 자료와 이상 연구 참고 문헌

 

[출판사 서평]

 

이상문학대사전李箱文學大事典은 올해 80주기를 맞는 이상이 남긴 모든 문학 예술적 자취를 사전식으로 망라하여 새롭게 정리한 책이다. , 한 권으로 만나는 이상의 문학 예술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_문학 작품에서는 이상의 문학 작품(, 소설, 수필 및 산문)의 서지 사항과 그 내용에 대한 해설을 중심으로 꾸몄다. 이상은 희대의 천재 예술가로 평가된다. 어떤 사람은 그의 문학이 드러내고 있는 파격적인 기법으로 인해 그를 전위적 실험주의자로 지목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를 19세기를 거부한 반전통주의자였다고 지목한다. 한국문학의 모더니티의 문제성을 초극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그의 문학이 보여주는 난해성에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상의 문학은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그 성격이 고정되는 것을 거부한다. 해마다 수많은 평문과 연구 논문이 이상 문학을 위해 발표되고 있지만, 그 관심과 새로운 접근에도 불구하고 이상 문학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상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자부하는 이 책이지만 이상 문학에 대한 비평적 논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2_미술 작품에서는 이상이 남긴 미술 작품에 대한 정리?소개로 꾸며졌다. 이상이 직접 그린 몇 편의 초상화, 이상이 도안한 잡지 표지화, 작품 속의 삽화 등을 복원하여 수록했다. 특히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신문 연재 당시 이상이 그린 삽화를 확대?복원하여, 연재 당시의 소설 원문의 내용을 통해 박태원이 소설 속에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과 이상이 자신의 삽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내용이 어떤 관계였는지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화가를 꿈꾸었던 이상의 미술에 대한 열망과 함께 사물을 보는 이상의 독특한 시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3_작품 속의 인명 및 작품명에서는 이상의 작품 속에서 언급되었던 인명과 작품에 대한 조사 내용을 사전식으로 배열했다. 이상은 자신의 글 가운데에서 특이한 패러디의 방식으로 다른 문인의 이름이나 작품을 인유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기 문학의 세계와 대비하기 위해 다른 문인들의 작품들을 언급한 경우도 많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상 문학이 지니고 있는 특징적인 경향을 이해하는 데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로서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4_이상의 삶과 문학에서는 이상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을 최대한 조사?공개하였다. 이 책에서 이상의 호적부 제적등본을 다시 공개했으며, 그 부친의 이름을 김영창’(김연창이라고 소개된 책이 많음)으로 바로잡았다. 이상의 경성고등공업학교 학적부를 통해 그가 건축학과 수석 졸업자였음을 공식 확인하였고, 1929년 일본인 중심의 조선건축회정회원으로 입회했던 사실도 자료를 통해 다시 밝혔다. 1936년 이상이 동경으로 떠난 날짜도 1024일로 새롭게 추정했으며, 그가 묵었던 동경 간다의 하숙집 주소도 동경 간다구 진보정 3정목 10-1번지 4로 확정해 놓았다.

부록_이상의 사진 자료와 이상 연구 참고 문헌에서는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추억의 가지가지를 공개한다. 이 사진첩은 1929년도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 가운데 한국인 학생 17명을 위해 이상이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이다. 이 사진첩의 구성과 편집을 보면 이상이 얼마나 조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상 연구에 참고해야 하는 중요 연구서와 자료를 목록화하여 추가했다.

 

이상의 모든 것-지은이 권영민의 책머리에중에서

이상의 짧은 생애는 삶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는 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의 개인적인 행적과 문단 활동은 객관적으로 서술되기보다는 오히려 과장되거나 신비화되어 왔다. 특히 그의 문단 진출 과정, 특이한 행적과 여성 편력, 결핵과 동경에서의 죽음 등은 모두 일종의 일화처럼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상의 문학 텍스트 자체도 이러한 삶의 특징과 결부되어 잘못 해석되거나 왜곡 과장된 경우가 허다하다. 이상의 삶은 명확한 사실관계의 규명이 없이 어물쩍 넘어가거나 엉뚱하게 포장되면서 그가 살았던 삶 자체가 하나의 스캔들이 되고 말았다. 기왕의 연구자들이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자명해졌을 문학 텍스트마저도 엉뚱한 설명이 더해지고 해석이 과장되면서 애매모호한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게 된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이상 문학은 그 텍스트에 대한 깊이 있는 독해 작업도 없이 연구자나 평자의 자의적 해석에 이끌려 엉뚱한 의미로 과장되고 왜곡된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모든 평가는 특이하게도 그의 천재성에 집중된다. 객관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이 천재성(?)으로 인하여 이상 문학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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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육필(肉筆) 원고

 

 

나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글을 쓴다. 글자판을 두드리면 컴퓨터 화면에 글자가 찍힌다. 내가 글자판을 잘못 눌러도 어지간한 낱말은 컴퓨터 자체 내에서 잘잘못을 가려내어 철자법에 맞춰준다. 간혹 잘못 쓴 부분이 생기거나 추가해야 할 내용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잘못된 부분을 지워버리고 다시 고쳐 쓰기가 아주 쉽다. 글의 분량도 금방 계산해주고 글자의 크기나 모양도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하니 그 편리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글쓰기가 모두 끝나면 원고를 파일 상태로 컴퓨터에 보관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필요하면 컴퓨터를 켜고 그 파일을 열어볼 수 있다. 원고를 부탁해온 출판사 편집부에는 이메일로 파일을 전송하면 그만이다.

컴퓨터가 널리 이용되기 전에는 누구나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썼다. 원고지는 정방형의 칸을 일정하게 배열해 거기에 글자를 써넣도록 만든 용지이므로 글자 모양이나 글의 길이를 계산하기 쉽고 공백을 이용하여 글을 고쳐 쓰기도 편하다. 큰 신문사나 잡지사에서는 아예 자기네 전용으로 원고지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원고지에 글을 쓰는 방식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활판 인쇄가 널리 보급되면서 등장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 전부터 이미 원고지를 이용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출판 인쇄 작업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규격화된 원고지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글쓰기에 알맞게 정해진 크기의 용지를 사용했다.

나도 당연히 글을 쓰면서 원고지 뭉치를 끼고 살았다. 학생시절에 썼던 리포트는 모두 원고지에 작성했다. 잉크와 펜으로 쓰던 원고가 만년필 글씨로 바뀌었고 편리한 볼펜이 동원되기도 했다. 내 대학 졸업논문은 펜글씨로 원고지에 썼고, 1980년대 초반에 제출했던 박사학위 논문도 모두 2백자 원고지 천 매 가까운 분량을 만년필로 원고지에 작성했다.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인쇄소에 부탁하여 나만을 위한 원고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다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원고지에 급한 글을 썼던 적도 있고, 밤늦도록 원고지를 책상 위에 펼쳐두고 마감날짜에 맞추기 위해 머리를 짜내기도 했다. 문단 초년생 시절 원고지에 글을 써내려가던 내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컴퓨터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원고지와 멀어졌다. 컴퓨터에 내 손 글씨를 모두 빼앗겨버린 셈이다. 나는 문학 연구 자료들을 쉽게 정리하고 보관하면서 컴퓨터의 편리함에 깊이 빠져들었다. 컴퓨터로 쓰는 글은 그 자체가 완성본처럼 그대로 남는다. 원고지에 글을 쓰던 때의 초고(草稿)가 컴퓨터에서는 사실상 사라진다. 글을 원고지에 쓰게 되면 당연히 초벌 원고가 남는다. 물론 초고 상태의 글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서 얼마든지 그 내용을 고치거나 바꿀 수가 있다. 글의 전체 흐름을 헤아리면서 초고를 손질하면 어느 정도 글이 정리된다. 나는 버릇처럼 이 초벌 원고를 다시 원고지에 깨끗이 베껴 쓰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곤 했다. 그리고 글을 완성 한 후에 남는 초벌 원고가 아까워서 한동안 그걸 책장 속에 보관했다. 초고는 글쓰기의 첫 단계에서 이루어졌던 생각의 발단을 그대로 간직하여 보여준다. 원고지 위에 어지럽게 고쳐 쓰거나 덧붙인 글귀를 보면 생각의 흐름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이곳저곳 이사를 다니면서 보관했던 초벌 원고들을 모두 버려야 했고, 컴퓨터 사용의 편리함에 빠져들면서 초고의 소중함 자체마저 잊고 말았다. 컴퓨터 글쓰기는 생각의 흔적을 지워나가는 작업이다. 새로운 생각이나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전의 생각을 그대로 없애버리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글쓰기가 이루어지니 초고라는 것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내가 자료 조사를 하면서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우리 문인들의 원고지 글씨 가운데에는 심훈의 시집 <그날이 오면>의 검열본 원고와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 원고에 담긴 사연도 사연이지만 원고지의 칸을 메워나간 글씨 자체가 시인의 기품과 그 시 정신에 그대로 어울려서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료들이 다행히도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고 전란을 겪으면서도 온전히 보존된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소설가 채만식의 육필 원고와 시인 김수영의 육필 원고도 이미 영인본으로 간행되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지금도 손으로 직접 원고를 쓰는 원로 문인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비평가 김윤식 선생은 그동안 백 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는데, 그 엄청난 글들을 모두 원고지에 직접 쓰신 것으로 유명하다. 볼펜 글씨로 꾹꾹 눌러쓴 김 교수의 글은 잡지사 편집부에서는 늘 화제거리였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도 손 글씨로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모두 썼고 지금도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쓴다. 벌교에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의 전시실에 어린애 키만큼이나 높게 쌓여 있는 소설의 육필 원고를 보고는 모두가 입을 벌린다. 소설가 김 훈 선생은 연필 글씨가 유명하다. 그 독특하고도 품격이 느껴지는 글씨를 일반인들이 컴퓨터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서체를 개방한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원로 시인 김남조 선생은 아예 컴퓨터를 모르고 살아오셨는데, 지금도 굵은 싸인펜을 잡고 원고를 쓰신다. 그 글씨에서 순정한 시 정신을 지켜 오신 영혼의 힘 같은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인은 수천을 헤아린다. 이분들 가운데 손 글씨로 원고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아마도 대부분 컴퓨터를 이용할 것이기 때문에 원고지 위에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씨를 만나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가끔 우리 문인들이 직접 손으로 써내려간 육필 원고를 모두 한자리에 모아둘 수는 없을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일본이 자랑하는 여러 곳의 문학관에 가보면 가장 중요한 볼거리가 문인의 육필 원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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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의 귀촉도그리고 소쩍새

 

  

초저녁부터 멀리 뒷산에서 소쩍새가 울어댄다. 소쩍다 소쩍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소쩍 소쩍하기도 한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풍년이 들까를 헤아렸던 할머니 생각도 난다. 밤늦도록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가 한없이 처량하다. 나는 소쩍새 울음소리를 잘 알아들으면서도 소쩍새를 직접 본 적은 없다.

 

시인 서정주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귀촉도라는 시가 있다. 시집 󰡔귀촉도(歸蜀途)󰡕(1948)의 표제작이다. 시의 제목인 귀촉도라는 한자어는 글자 그대로 풀이할 경우 () 나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뜻이 될지 모르겠다. 시인 자신은 이 작품 말미에 두견이라고도 하고 소쩍새라고도 하고 접동새라고도 하고 자규(子規)라고도 하는 새가 귀촉도귀촉도그런 발음으로써 우는 것을 말한다라고 부기해 두고 있다.‘귀촉도라는 말을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뜻하는 것으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쩍새를 두고 두견, 접동새, 자규 등의 별칭을 갖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 소쩍새와 두견새는 그 종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 권오길이 찾은 발칙한 생물들>이라는 책을 보다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두견새는 뻐꾸기의 일종이라 녹음에 헹군 울음을 명랑하고 경쾌하게, 싱그럽고 구성지게 주로 낮에 노래하는데, 소쩍새는 올빼미를 닮은 놈으로 가슴에 사무치고 에는 가엽고 애처로운 울음을 야밤에 울어댄다는 것이다. 사전에서마저 두견이와 소쩍새를 뒤죽박죽 혼동하여 둘 다 두견이, 접동새, 귀촉도, 자규, 불여귀, 소쩍새로 섞어 적어 놓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책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두견이는 4월경에 동남아시아에서 우리나라로 날아와 번식하고 9월경에 남하하는 여름철새이다. 몸길이 약 28센티미터로 얼핏 보면 뻐꾸기를 빼닮았으나 몸집이 훨씬 작아 영어로 ‘little cuckoo’라 부른다. 맑고 경쾌한 뻐꾸기 울음에 비해서 두견이 소리는 매끄럽지 못하고 좀 둔탁한 편이지만, 수컷은 나뭇가지에서 날면서 "쿗쿗 쿄끼쿄쿄, 쿗쿗 쿄끼쿄쿄, 삐삐삐삐" 하고 재빠르고 멋들어지게 울어 댄다. 두견이 노랫소리는 결코 가엽고 슬프거나 가련하고 애잔하지 않으며 되레 경쾌하고 상쾌한 기분까지 든다. 소쩍새도 여름철새이다. 몸길이 20센티미터 정도로 올빼밋과에 속한다. 우리나라에는 4월쯤에 날아와 10월까지 머물러 번식한다. 회갈색 바탕에 검정과 흰색의 얼룩무늬가 나 있어 침엽수의 수피(樹皮)와 비슷하게 위장하고, 사람 낌새를 채면 기겁하여 숨기에 역시나 관찰하기 어렵다. 깜깜한 야밤에 "춋쵸, 촛쵸, 소쩍", "촛촛쵸, 촛촛쵸, 소쩍다, 소쩍다" 하고 운다. 우는 새의 입속이 핏빛처럼 붉어서 옛사람들은 피를 토하면서 죽을 때까지 운다고 믿었다 

시인 서정주가 귀촉도를 처음 발표한 것은 1943년 잡지춘추(春秋)2호에서였다. 이 작품은 서정주의 시적 변모과정의 한 단계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三萬里).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三萬里).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질없은 이 머리털 엮어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목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귀촉도는 사랑하는 임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각 연마다 시적 정황을 바꾸어 그 깊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1연에서는 시적 화자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된 임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게 된 임과 이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피리 불고가는 길에 진달래 꽃비라고 묘사한 대목은 호사스런 상여(喪輿)의 행렬을 떠올리게 한다. 슬픔을 억제하기 위한 시적 장치에 불과하다.‘서역 삼만리라든지 파촉 삼만리라는 거리는 시적 화자가 심정적으로 느끼는 죽은 임과의 아득한 거리를 강조하기 위해 동원한 말이다. 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난 것이다. 2연은 임을 떠나보내면서 시적 화자가 느끼게 된 회한(悔恨)의 정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이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은 누구에게도 아름답게 보일 필요가 없다. 그 머리를 은장도 베어내어 그것으로 메투리를 만들어 임이 신고 가도록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임에게 모든 것을 다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사무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연은 밤이 늦도록 울어내는 소쩍새의 울음을 그려낸다. 밤하늘에는 굽이굽이 은하수가 흐르는데 소쩍새는 목이 터지도록 울어댄다. 그런데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라는 마지막 행에서 소쩍새의 실체가 드러난다. 바로 하늘 끝으로 홀로 가신 임과 소쩍새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소쩍새는 시인 서정주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전설로 태어난 셈이다. 죽은 임은 소쩍새가 되어 그 이별을 슬퍼하며 밤새도록 울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서정주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시인 오장환의 시 귀촉도(歸蜀途)와 특이한 상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장환은 1941귀촉도라는 시를 잡지춘추(1941. 4)에 발표한 바 있는데, 여기에는 정주(廷柱)에 주는 시라는 부제를 달았다. 오장환이 일제 말기에 친구인 서정주를 생각하며 쓴 이 시에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방황하던 청춘과 그 망향의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의 텍스트에 파촉으로 가는 길은 서역 삼만리라는 구절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막막한 거리감은 앞서 소개한 서정주의 귀촉도에서 이승과 저승의 거리로 바뀌어 그려진 바 있다.

  

파촉(巴蜀)으로 가는 길은

서역 삼만리.

뜸부기 울음 우는 논두렁의 어둔 밤에서

길라래비 날려 보는 외방 젊은이,

가슴에 깃든 꿈은 나래 접고 기다리는가.

 

흙먼지 자욱히 이는 장거리에

허리끈 끄르고, 대님 끄르고, 끝끝내 옷고름 떼고,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혼자 앉아서

창 넘에 뜨는 달, 상현달 바라다보면 물결은 이랑이랑

먼 바다의 향기를 품고,

파촉의 인주(印朱)빛 노을은, 차차로, 더워지는 눈시울 안에

 

풀섶마다 소해자(小孩子)의 관들이 널려 있는 뙤의 땅에는

너를 기두리는 일금 칠십원야(一金七十圓也)의 쌀러리와 죄그만 STOOL이 하나

집을 떠나고 권속마저 뿌리이치고,

장안 술 하룻밤에 마시려 해도

그거사 안 되지라요, 그거사 안 되지라요.

 

파촉으로 가는 길은

서역 하늘 밑.

둘러보는 네 웃음은 용천 병()의 꽃피는 울음

굳이 서서 웃는 검은 하늘에

상기도, 날지 않는 너의 꿈은 새벽별모양,

아 새벽별모양 빤작일 수 있는 것일까.

 

오장환의 귀촉도에 대해 서정주는 어떻게 화답하고 싶었을까? 오장환이 느끼고 있던 현실적 고뇌를 서정주는 어떻게 해석하고 싶었을까? 이런 질문은 두 시인의 오랜 우정과 문학적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장환의 귀촉도를 두고 시인 서정주가 다시 귀촉도로 화답했다는 것은 주목해 볼 만하다.

서정주의 귀촉도는 전통적 정서의 세계를 매개로 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 이 시에서 은하에 맞닿는 시적 공간의 폭은 한의 정서의 폭과 깊이에 서로 조응한다. 시인은 한이 서려 있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시적 공간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정한의 의미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특히 원형적 심상이라고 명명할 만한 요소들이 시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이별의 의미를 공간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도 소쩍새 울음소리가 멀리 들린다.

 * 정정합니다. 서정주의 <귀촉도>는 원래  잡지 <여성>(1940. 5)에 발표된 것이므로 오히려 오장환의 시 <귀촉도>가 서정주 시에 대한 화답이라고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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