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그리고 뜨거운 한류의 현장

 

1

지난해에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BTS에 관한 강의가 개설되었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화제가 된 바 있다. 한국의 언론이 크게 보도했고 미국에서도 교민들 사이에 관심이 크게 일었었다. 내가 만났던 교민 가운데 이 강의 이야기를 직접 내게 물었던 분들도 있다. 지난해 봄 학기에 버클리대학에 개설되었던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 방탄소년단”(Next Generation Leaders: BTS)이라는 강좌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버클리대학은 매학기 다양한 강좌와 교육 프로그램을 폭넓게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디칼’(DECAL)이라는 약자로 흔히 표기하는 민주적 교육 프로그램’(Democratic Education at Cal)이다. 이 프로그램은 버클리대학 학생들이 직접 개설하고 스스로 참여하여 지식을 공유하는 열린 강좌이다. 물론 지도교수도 정해져 있지만 지도교수가 직접 강의를 이끌어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과정을 학생들 스스로 설계하고 직접 운영한다. 강좌 내용과 관련되는 모든 자료들을 학생들이 모두 참여하여 조사하고 그 내용을 분담하여 보고하고 토론한다. 과목당 일정 기준에 의해 2학점을 자율적으로 부여하는데 A, B, C와 같은 평점을 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성격의 강좌가 매 학기 150 강좌 이상 운영되고 있으며 강좌마다 대개 30명 안팎의 학생들이 참가하고 있다.

버클리대학의 학생들이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라는 주제로 한국의 유명한 아이돌그룹 BTS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직접 교과 내용을 설계하여 운영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고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동년배의 미국 대학생들에게 BTS의 음악과 그 활동이 새로운 문화적 흐름의 어떤 징후로 읽혀지고 있음을 말한다. BTS의 음악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기획사에 의해 잘 다듬어져 세상에 내놓은 문화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21세기 초반 세계 문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뮤지션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BTS는 멋진 의상, 유명 음악인들이 만들어주는 자유로운 음악,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터득한 현란한 몸짓, 그리고 전 세계 같은 또래들이 보내주는 환호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새로운 음악인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가지게 된 셈이다.

전 세계의 젊은이들도 BTS의 음악에 열광한다. 이미 BTS의 뮤직 비디오 가운데 8억뷰를 돌파한 ‘DNA’가 유명하지만 불 타 오르네 (파이어)’ ‘페이크 러브’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보이 위드 러브)’ 등이 모두 6억뷰를 넘어선 바 있다. 최근에 공개한 마이크 드롭리믹스 뮤직비디오도 단 순간에 유튜브 조회 수 6억뷰를 기록했다고 한다. BTS의 뮤직비디오는 독특하고 강렬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그룹 전체의 화려한 퍼포먼스와 거기에 가미된 세련된 영상미가 매력을 발하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빌보드의 각종 차트를 가장 뜨겁게 달궜던 BTS의 음악은 이제 21세기의 비틀즈로 세계의 음악팬들에게 각인되고 있다.

내가 미국에서 실감했던 것도 BTS의 인기이다. 미국의 대중적인 서점 체인인 반스 앤드 노블은 지난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의 세일기간에 서점을 찾는 손님들을 잡기 위해 다양한 상품을 준비했다.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각종 캐릭터와 장난감들이 온통 매장 안을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점 한복판에 만들어 놓은 특별 코너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BTS. ‘K-POP’이라는 붉은 글씨가 네온사인처럼 반짝이는 이 특별 코너에는 BTS 멤버들의 사진과 음반 그리고 각종 캐릭터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장식되어 있다. 학교를 파한 뒤에 서점에 들른 이웃 고등학교 학생들이 줄을 지어 BTS의 특별 코너를 둘러싸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2

BTS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류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런 이야기라면 지난해 아카데미상을 휩쓴 기생충이 다시 생각난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버클리대학 캠퍼스를 벗어나 도로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감상했다. 늦가을부터 상영되기 시작한 이 영화는 지금도 미국의 영화팬들을 사로잡고 있다.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이 북미 지역에서도 각종 영화상을 휩쓸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진가를 다시 확인해 볼 수 있다. 시카고 영화비평가협회로부터 작품상을 비롯하여 감독상, 각본상, 외국어영화상 등 4개 부분을 받았고 최근 샌프란시스코 영화비평가협회로부터도 감독상, 각본상, 외국어영화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영화전문가들은 기생충이 높은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성까지 갖췄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평판과 인기에 힘입어 기생충은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상인 골든글로브에 감독상, 각본상, 외국어영화상 등 3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고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세계 영화의 꽃으로 주목받는 아카데미에서도 한국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작품상을 받았다. K-드라마에 이어 이제 K-필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K-뷰티라는 말도 생겨났다. 미국의 대형 약국 체인점인 CVS에 들어가면 입구에 설치된 ‘K-BEAUTY’ 특별 코너를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유행하며 널리 팔리고 있는 화장품류가 전시되어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마스크 팩이다. K-푸드에도 관심이 크다. 웬만한 슈퍼마켓에는 한국에서 직수입되는 김치라면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간다. 한때는 그 특유의 냄새와 맛 때문에 혐오 식품처럼 취급되었던 김치가 건강식품으로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의 식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뉴욕이나 LA의 한인 타운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식당에서 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메뉴는 순두부찌개, 돌솥비빔밥, 해장국 등이다. 매운 맛에 입맛을 들인 사람들이 떡볶이를 간식으로 즐기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특이한 문화현상은 한류의 확산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쩌면 이것은 전 세계에서 애용되고 있는 한국산 자동차와 각종 가전제품들의 인기와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산 자동차를 타고 날마다 직장에 출근하는 미국 중산층 직장인의 집안을 보면 대개 거실 한복판에 한국산 대형 평판 텔레비전이 놓여 있다. 주방에 비치된 냉장고도 한국에서 수출한 고급 대형 냉장고가 비치되어 있고 세탁기기와 건조기도 모두 한국산이다. 손에는 한국산 휴대전화를 들고 다닌다. 미국인들의 일상에 그만큼 한국이 가까이 접근해 있으며, 다문화사회를 표방하고 있는 미국에서 한류가 그 나름의 중요한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TV드라마나 대중음악에서 시작된 대중문화의 해외 유통과 소비가 작은 한류의 출발이었다면, 이제는 음식이나 패션, 그리고 생활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적 현상은 특정한 분야나 지역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한때의 유행이 아니다. 전 지구적인 현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확산의 속도가 빠르고 그 폭과 영향이 커지고 있다. 게다가 한류의 저변에 세계어로 자리잡은 한국어와 한글의 보급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자랑스런 일이다.

3

미국에서 한류는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라는 말로 통한다. 하지만 이 말보다는 K-팝이라는 말이 한류를 대표한다. 한국의 대중음악, TV드라마, 영화, 컴퓨터게임 등의 문화상품이 일본 중국 그리고 동남아 등지의 해외로 전파되어 널리 소비되는 현상은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초기에는 한류라는 특이한 문화 현상을 태평양 건너 동남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수한 문화 소비 형태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떤 교수는 아예 한류라는 말 자체를 부인하려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한류 현상은 전 세계에서 여기저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문화상품의 가장 큰 소비시장을 거느리고 있는 미국에서도 한류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현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맥도널드 햄버거는 전 세계에서 팔린다. 스타박스 커피숍이 각국의 중요 도시에 늘어서 있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내는 영화가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미국의 팝 가수 비욘세의 노래에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한다. 이런 일은 미국인들에게 너무도 당연하며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산 김치와 라면이 미국의 슈퍼마켓에 즐비하고 한국의 연안 바다에서 나오는 김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맥주 안주로 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기이하고 새롭다. 더구나 팝의 본고장에서 K팝 그룹 BTS가 누리는 인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아무도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섣부르게 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BTS의 열기를 두고 한국문화의 세계화를 지칭하는 한류현상이라고 말한다면 이제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이른바 문화상품의 대중적 소비와 그 흐름을 놓고 볼 때 문화의 세계화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세계 각국의 대중은 그들이 선호하는 대중음악으로 BTS의 뮤직비디오를 즐기며 모두 하나가 된 지구를 떠올릴 것이 분명하다. 유튜브라는 특이한 매체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BTS의 전신자(傳信者)로서의 자신들의 존재와 역할을 강조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BTS를 하나의 잘 기획된 문화상품이라고 한다면 이 특이한 현상은 결국 세계화라는 물결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 거대한 문화시장의 역동성을 그대로 말해주는 셈이다.

그렇지만 BTS는 일시적으로 소비되는 문화상품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러한 주장은 BTS의 등장과 그 역할과 대중적 인기를 경제 논리에 의해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맥락을 같이한다. BTS를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본다면 BTS ‘신드롬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음악과 춤에 대한 열광적 환호는 금방 시들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언제 어디서든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다시 되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BTS21세기 문화의 새로운 흐름 속에 음악적 정체성을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이 앞장서서 추구하고 대중이 뒤에서 지지하며 따를 수 있는 새로운 음악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에 주력해야 한다. 비틀스가 자신들의 음악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의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것처럼 BTS는 자기 음악에 집중하면서 자기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열어가야 한다. 전 지구상에서 BTS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윤리, 자신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예술과 미학에 자기 색깔의 음악의 옷을 입힐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중의 인기는 허망하게 바로 사라진다. BTS가 잘 팔리는 문화상품으로 지금의 대중적 인기에 만족할 것인지 새로운 음악,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위대한 뮤지션으로 커나갈 것인지는 이제 BTS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스마트 폰에 매달린 사람들

 1

지하철 좌석에 앉아 있는 승객들이 대부분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동영상 화면을 재미있어 하면서 보는 사람, 뉴스를 보는 사람, 만화 화면을 펼쳐보는 사람,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람...... 모두가 그 작은 화면에 열중이다. 책을 펼쳐 들고 있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 길거리에서도 공원의 산책길에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책을 만드는 출판사도 이 새로운 환경의 변화와 매체의 특성을 무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책이 안 팔린다고 야단이다. 서점에 내놓은 책 가운데 그나마 팔리는 것은 자기개발서이거나 취업 준비용이 많다는 것이다. 유명 작가의 신간 소설도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니 출판업계가 모두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독서 인구가 많기로 유명한 일본에서도 출판계와 서적시장이 불황이란다. 미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책 대신 스마트 폰을 들고 작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세상이 이렇게 바뀐 것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가구당 월평균 소비 지출액은 250만원을 조금 넘는다. 통계청이 발표한 이 통계자료에서 가구당 오락·문화 부문 지출이 월평균 192000원이라고 한다. 전년보다 거의 10% 증가했단다. 한국출판저작권연구소에서는 이 자료에 근거하여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월 평균 도서 구매 비용이 4960원이라는 흥미로운 분석 결과를 내놓고 있다. 가구당으로 따지면 월평균 도서 구매비가 명목액 기준으로 12000원 정도이지만, 2006년 이래 역대 최저치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수치를 두고 가구당 한 달에 책 한 권 정도를 구매하고 있다는 뜻으로 간단하게 넘겨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자녀들의 학습용 참고서 구매를 제외하고 본다면, 집에서 책을 사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고급 커피숍에서 지불하는 커피 한 잔 값 정도에 불과한 액수가 한 달에 책을 사는 데에 쓰는 돈이라고 말하면 좀더 실감이 난다.

2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을 꺼내면, 요즘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책 타령이냐고 핀잔을 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달에 책 한 권도 제대로 사지 않는 것을 빠듯한 살림살이 탓으로만 돌릴 일은 아니다. 가구당 월평균 통신비가 134000원이었다는 통계가 바로 뒤에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집에서 매달 지출하는 여행비용을 비롯하여 영화 구경이나 공연 관람, 서적 구입 등 문화 오락비에 버금갈 정도로 통신비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 네 식구가 함께 사는 집이라면 1인당 35천원 가까이 통신비를 지출하고 있는 셈이다. 식구마다 모두 자기 휴대전화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물론 책 대신 스마트 폰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스마트 폰을 누르면 찾을 수가 있으니 구태여 돈을 써서 책을 사고 답답하게 책장을 또 넘겨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핑계를 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스마트 폰의 사용 내역을 들여다보면 그런 말에 수긍하기가 쉽지 않다.

책 읽기를 말하면 독서는 자기 취미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중 고등학교 학창 시절에 대학 입시에 매달려 지겹게 책과 씨름했고,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 취업 준비로 다시 손에 잡은 것이 각종 시험 준비서 뿐이었다는 것이다. 가까스로 직장으로 얻어 생활 전선에 뛰어든 사람들은 아예 책을 펼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다. 주어진 업무에 시달리고 반복되는 모임에 지쳐 돌아오면 집에 들어와 책장을 넘길 틈도 없다. 자녀들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는데 집안 살림에 쫓기면서 주부들이 언제 혼자서 책을 들고 읽어볼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바쁘고 여유가 없고 한가하게 책장을 넘길 틈이 없다. 그러니 여간 결심이 아니고서는 서점이라도 한번 들러 책 한 권 사들고 오기가 쉽지 않다.

3

생활 속의 책 읽기가 개인의 취향이나 관심과 연관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데에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따질 일은 더욱 아니다. 책 읽기는 교양인의 생활이어야 한다. 책 읽기는 자기 집중을 필요로 한다. 텔레비전의 화면이나 스마트 폰 속의 동영상은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이지만 책은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그 내용을 따라간다. 책 읽기는 사고의 집중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해와 비판, 분석과 성찰의 힘을 키워준다. 그러므로 책 읽기는 생활 속에서 필수의 영역이지 개인적 취향에 따르는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책 읽기를 생활화하기 위해서는 늘 곁에 책을 펼쳐놓아야 한다. 자신이 직접 서점에 가서 서가에 진열된 책들을 훑어보고 읽고 싶은 책을 골라보는 것이 가장 좋다. 물론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를 정하는 일에서부터 직접 책을 사는 데까지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낼 일은 아니다. 우선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을 잘 생각하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한다. 책은 혼자서 읽을 수 있지만 서로 의견을 나누며 함께 꾸준히 읽어갈 동료가 있다면 훨씬 좋다. 집안 식구들끼리라든지 직장 동료들이든지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책을 읽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문화 활동이 어디 있겠는가? 책 읽기는 습관화하기 전까지는 생활 속에 터잡기 어렵다. 일상의 모든 일들이 책 읽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대로 책 읽기를 시작하면 큰 부담 없이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다. 책 읽기가 고상한 취미에서 고급한 문화 활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평생 책을 끼고 살아왔다. 나의 책 읽기는 내 문학 공부의 출발이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책 읽기가 일종의 직업이 되면 때로는 짜증나고 힘이 든다. 텍스트를 가운데 두고 작가와 맞서야 하는 일이 늘 피곤하다. 그러므로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즐겁고 편한 책 읽기를 권한다. 되도록이면 한 달에 한 권씩 새로 나온 시집을 사서 읽으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집 한 권을 사서 읽어보는 일이라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큰 부담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작은 시집 한 권이지만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정채(精彩)의 언어가 거기에 담겨 있다. 온통 더럽혀진 언어의 흙탕물 속에서 벗어나 정제된 언어 표현의 묘미를 오롯하게 접할 수 있다.

4

수년 전의 일이다. 집집마다 거실의 장식장을 걷어내고 그것을 서가로 바꾸자는 운동이 일어났었다. 생활 속에서 책과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낸 방안이었다. 그때는 상당한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파트의 거실 벽에 책장을 세우고 책을 가지런히 꽂아둔 집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운동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다시 커다란 TV가 벽면을 장식하고 근사한 도자기나 사진틀로 가득 찬 새로운 장식장이 서가를 다시 퇴출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거실에 서가를이라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많은 호응에도 불구하고 왜 생활 속의 책 읽기로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는지 모르겠다. 책 읽기를 생활 속에 정착시킬 수 있는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이 뒤따르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삶은 스스로를 황폐하게 만든다. 책을 읽으면서 사고력과 판단력을 키우지 않으면 삶의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 사라진다. 인간이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에만 매달리게 되면 결국은 모두가 야만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스마트 폰에만 매달린 채 한 달에 커피 한 잔 값도 책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첨단의 문명시대를 살아가는 참다운 태도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감각적 자극에만 길들여지는 스마트 폰 시대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천없 2020.08.06 07:5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전자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꼭 종이책이어야 하나요?

  2. kwonsnu 2020.08.06 19:01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전자책은 앞으로 출판이 나아가야할 큰 방향의 하나이지요.

올해도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의 덧없음이 유달리도 마음을 허전하게 합니다. 시인 김영랑은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밤을 안쓰러운 마음결에 담아 제야라는 시로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제운 밤 촛불이 찌르르 녹아 버린다 / 못 견디게 무거운 어느 별이 떨어지는가 // 어둑한 골목골목에 수심은 떴다 갈앉았다 / 제운 맘 이 한밤이 모질기도 하온가 // 희부연 종이등불 수줍은 걸음걸이 / 샘물 정히 떠붓는 안쓰러운 마음결 // 한 해라 기리운 정을 묻고 쌓아 흰 그릇에 / 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 비사이다.’

 

한 해 동안의 삶을 돌아보면 기쁨보다 수심이 더 많습니다. 떨쳐버리기 어려운 그리운 정이 다시 마음속에 모이고 쌓입니다. 시인은 제야의 촛불을 밝힌 채 맑은 샘물을 떠놓고 그 맑음을 자신의 마음에 비춰봅니다. 이 마지막 날의 밤은 참으로 그냥 보내기 힘든 시간입니다. 지나간 1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하면서 시인은 마음속 깊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생각하니 어린 시절 시골 고향집의 섣달 그믐날 풍경이 떠오릅니다. 섣달 그믐날은 한 해 동안의 묵은 먼지를 모두 쓸어내기 위해 집안 식구들이 나서서 하루 종일 수선스럽게 소제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집 청소가 끝나면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데우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차례로 목욕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녁에 부엌에서 시루떡 찌는 냄새가 온 집안에 풍겼습니다. 커다란 접시에 수북하게 시루떡을 담아 집안 곳곳에 놓아두었습니다. 집안에 잡귀가 들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이날 밤만은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잠을 자는 사람은 눈썹이 희어지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들기름 접시를 소반에 받쳐놓으시고는 목화솜을 말아 심지를 만들어 식구 수만큼 접시에 늘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각각 심지에 불을 댕기시면서 불꽃이 곧고 맑게 타올라야 내년 한 해 운수가 좋단다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모두가 할머니의 말씀에 숨을 죽인 채 접시 위로 타오르는 빨간 불꽃을 지켜보면서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맞던 섣달 그믐날의 풍경입니다만, 이런 단란한 제석(除夕)의 시간을 잊은 지가 오래입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이 터지고 번졌습니다. 온 국민을 슬픔으로 몰아넣은 세월호 참사는 잊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참담해 하면서도 부끄럽고 죄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서민들의 하루하루 살림살이는 팍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정부에서 온갖 방책을 내놓아도 한 번 움츠러든 경기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가진 자들은 남보다 더 가진 힘으로 유세를 떨고 있는데,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죄로 여길 수밖에 없는 허망의 현실을 탓할 뿐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하는 일 없이 사회로 내몰리고 있지만 누구도 묘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치는 치정(癡情)처럼 얽혀서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떠들면서도 자기네 권세 유지를 위해 서로 헐뜯으면서 파당 싸움에 힘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아무도 마음 편하게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조용히 보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저 안쓰럽고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혀 제야의 종소리를 흘려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요즘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데, 수세(守歲)라는 말이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 밤새도록 집안에 불을 밝혀두고 잠을 자지 않는 것을 두고 수세라고 했습니다. 집안에 불을 밝히고 잠을 자지 않아야 잡귀가 집안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속설이 이 말에 따라붙어 있었습니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세어버린다는 이야기로 어린 시절 가슴 조리게 만들었던 기억도 이 말과 연결돼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밤이니 쓸데없는 일을 삼가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보다는 지나간 일을 돌아보며 새해를 맞으라는 가르침을 하나의 금기(禁忌)처럼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섣달 그믐날 밤에는 불을 밝히고 정갈하게 몸을 가다듬은 채 한 해를 정리하고 다시 조신하게 새해를 맞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경건하게 새해를 맞아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야를 밝히는 촛불조차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은 각박하지만 모두가 사람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힘이 있는 자가 약한 사람을 부축해야 하고 가진 자가 헐벗은 사람을 돌보아야 하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모두가 보살펴야 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해 새로운 삶의 길을 서로 안내해야 합니다. 편 가르고 다투기보다는 모두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 전체가 다시 활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은 한 해가 끝나는 날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모두가 새해를 맞습니다. 그러므로 가는 세월의 자락에 매달리기보다는 새해를 맞는 기쁨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오늘 밤에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환하게 다시 켜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첫 눈뜸에 / 눈 내리는 청산을 보게 하소서 / 초록 소나무들의 / 청솔 바람소리를 듣게 하소서.’(김남조, 새해 아침의 기도)

 

권영민, 2014.12.30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올해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는다. 모두 힘을 합쳐 힘든 산업화의 과정을 통해 경제 성장을 얻어냈고, 숱한 희생을 바탕으로 민주화의 역정을 거쳐 사회 발전을 이룩했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성숙을 의미하는 문화 융성의 시대를 열어가는 일이 남아 있다.    

문화의 개념은 그 폭이 아주 넓다. 삶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 문화와 통한다. 문화는 삶의 과정에서 이루어내는 물질적 정신적 소산을 모두 포괄한다. 그러므로 문화는 인간의 삶 자체에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내적 능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모든 산물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학문, 예술, 종교, 도덕 등의 정신활동이 그 중심을 이룬다. 결국 문화는 인간이 역사적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낸 삶의 방식 전체에 해당한다. 여기서 삶의 방식 전체를 문화라고 규정할 경우 그것은 어김없이 가치문제에 대한 판단과 부딪치게 되어 있다. 삶의 방식이 어떠한 원리와 어떠한 방법을 취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화에 대한 관심은 문화의 의미와 본질을 밝히고자 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문화 발전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고 그 가치의 형성은 어떠한가를 사람의 삶의 과정 속에서 찾게 된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인식은 문화 현상 자체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비롯된다. 물론 중요한 것은 다양한 문화 개념의 중심을 어디에다 둘 것이며, 비판의 의미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당연하게 제기되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성찰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과 그 산물로서 문화의 구성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밝히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언제나 문화적 현상과 그 구성 자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지향한다. 이것은 문학이나 역사 또는 철학 등을 통틀어 문화적 가치로 표현할 수 있는 인문학의 내재적 힘을 말한다. 문화를 생산하는 원동력이 인간의 삶이라면, 삶의 인간다움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며, 인간의 정신과 인간 존재의 방식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문화의 기반을 이룬다. 하지만 인문학이 인간 삶의 가치를 구현해내는 학문이라고 해서 인간의 현실과 개개인의 삶을 그대로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 정신은 어떤 조건으로 제약되는 것이 아니며 무한의 가능성과 힘을 가진 채 열려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 인문학의 존립 근거인 이른바 인문정신이 가로놓여 있다. 인문정신은 인간의 자기반성의 근원이며 또한 자기성찰의 중심에 해당한다. 인문정신은 인간이 자기 존재와 그 가치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인간다움의 현실을 되찾고 인간의 삶의 풍요로움을 살릴 수 있는 힘이다.

문화 융성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인문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개인의 문화적 권리가 사회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한 사회가 스스로 문화를 창조해 가는 과정에는 문화적 주체의 확립이 필수적이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문화적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그동안 개인의 정치적 권리, 경제적 권리 등의 신장에 주력해 왔다. 하지만 경제 발전과 사회적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 문화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문화는 인간의 삶의 요체이기 때문에, 모든 문화적 주체는 공동체의 문화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이를 향수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로서 문화적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문화의 융성이란 문화적 민주화의 실현과도 상통한다. 한국사회는 정치 사회적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을 거쳐 경제 민주화의 단계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는 발전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그것이 사회 갈등의 핵심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문정신에 기초한 문화적 민주화의 실현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문화적 민주화는 사회발전의 개념에 사회 구성원들이 지닌 잠재력을 통합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주체의 확립, 문화적 다양성의 보장, 문화의 개방성과 창의성의 촉진 등을 확립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가 희망하는 문화 융성의 시대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면서 각자가 문화적 주체로서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균형있게 발전하고 모든 계층이 자유롭게 공동체의 문화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곧바로 문화 융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광복 70년, 이제부터 우리는 문화 융성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권영민, 2015.1.9)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글박물관이 곧 문을 연다. 한글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 정리 보존하기 위한 박물관이 생긴다는 것은 문화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특색 있는 박물관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도 기대가 크다.

'한글'이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의 명칭이다. 그러나 이 명칭은 세종대왕 때부터 사용된 것이 아니다. 세종대왕은 새로 만든 문자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말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이 말을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조선 시대 말기까지 언문이라고 통칭된다.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이 '언문, 언서, 반절' 등으로 지칭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많은 중국 문헌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다. 이 번역본 책들은 <두시언해> <소학언해> <화엄경언해> 등과 같이 모두 '언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한문으로 된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였다는 뜻이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조선 시대에는 훈민정음이라는 명칭보다 언무이라는 명칭이 더 널리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계몽 시대에 이르러 언문이라는 명칭 대신에 국문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다. '나라의 말'이라는 뜻으로 국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지식인들이 국문 글쓰기에 관심을 보이면서 <독립신문>(1896)과 같은 순국문 신문도 나오고 많은 도서들이 국문으로 출간된다. 대한제국 시절에 학부 내에 '국문연구소'(1907)를 설치하고 국어와 국문에 대한 연구를 전담하도록 한 것을 보면, 공식적으로 국문이라는 말이 우리글의 명칭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언문'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한다. 일본 총독부에서 우리말의 철자법을 정리하면서 '조선어 언문 철자법'이라는 공식 용어를 식민지 통치 기간 내내 사용하였다. 그리고 국어라든지 국문이라는 명칭은 일본어와 일본 글을 지칭할 경우에만 쓰도록 하였다.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은 조선어이고, 글은 언문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등장한 것이 '한글'이라는 말이다. 한글이라는 명칭은 우리글의 문화적 지위를 새롭게 주장하기 위해 고안된다. 이 말은 한글운동의 선구자였던 주시경 선생이 1910년 무렵부터 사용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주시경 선생이 1914년 조선어강습원의 명칭을 '한글배곧'으로 바꾸면서부터이다. 이 강습원에서 1915년부터 줄곧 '한글배곧'의 졸업증서 등이 발부되자 한글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한글이라는 명칭은 이때부터 일본인들이 다시 사용한 '언문'이라는 말에 맞서 당당하게 자기 위상을 갖추게 된다. 일본의 억압 속에서도 국어연구자들이 모여 1926년부터 한글 창제를 기념하기 위해 '가갸날'을 정하기도 하였지만 곧 '한글날'로 그 명칭을 바꿔쓰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일보> 등의 언론기관이 나서서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에 해방이 되면서 우리말과 글의 문화적 지위를 다시 찾게 되자, 여러 학자들에 의해 하나밖에 없는 글, 위대하고 큰 글, 바른 글이라는 뜻이 부연되어 덧붙여지면서 한글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한글은 세계 인류가 자랑하는 기록 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문자를 연구하는 세계의 모든 학자들도 한글의 특이한 구조와 기능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 한글은 우리 민족의 글이지만 세계 각국의 대학에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이것은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이다. 한글박물관의 개관을 앞두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시민의 의식도 한 단계 높아지기를 기대한다.(권영민)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서슬이 퍼런 판사, 검사라는 말에는 일 ()’ 자가 붙어 있는데, 잘 나가는 변호사에게는 선비 ()’ 자를 붙인다. 의사, 기사에는 스승 ()’가 붙어 있다. 소설가, 화가는 집 ()’를 쓰는데 목수나 가수는 손 ()’자를 붙인다. 광부, 청소부 등에는 지아비 ()’ 자가 붙어 있다. 특이하게도 시를 쓰는 사람만은 시인(詩人)’이다. 의사처럼 시사(詩師)도 아니고 변호사처럼 시사(詩士)도 아니다. 소설가와 같이 시가(詩家)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강은교 시인은 시인이여. 어서 떠나라. 아직도 거기 머물고 있는가. 옛집은 틀이며 진부함이며 상투성이라고 가르치며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먼 여행을 재촉한다. 그런데 사십년을 시를 써온 장석주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다. 나는 우주를 모른다. 다만 그 모름 속에서 먹고, 자고, 걷고, 웃는다. 나는 사십여 년을 시를 써왔지만 시를 잘 모른다. 그 모름 속에서 모름을 견디고 있을 따름이다.’ 그 곁에서 참으로 희한하게 잠언(箴言) 같은 이 말을 따라 정호승 시인도 아직 시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한때는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시를 쓴다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하고, 시가 무엇인지 좀 알고 쓰면 좋겠다는 열망감에 사로잡힌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모른다는 것은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지금 모르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다.’ 이기인 시인은 시는 생각하는 대로 다 쓸 수 없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응수한다. ‘시는 다 쓸 수 없어서 다행이다. 시의 욕심을 조금씩 놓아본다. 시는 잘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박정대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그를 유일하게 시인으로 만들었단다. ‘이 척박하고 천박한 지구에서 자신이 시인이라는 자의식을 갖지 못하면 그 사람은 그저 평범한 지구인일 뿐이라는 것이 박정대의 생각이다. 김언은 나는 죽음이 두려워서 시를 쓰고, 내 삶이 언제 어떻게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이미지를 본다.’ 라고 고백한다. 여태천 시인은 언제나 불안하다고 한다. ‘언어가, 세계가 사라질 것 같아 두렵다. 그런데, 언어는 나의 생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나의 몸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언어는 나의 몸을 은신처 삼아서 이 세계에 간신히 붙어 있다.’ 라고 엄살이다. 정끝별 시인은 시는 안 보이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기도 하고, 안 보이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도 할 것이다.’ 라며 애써 태연스럽다.

박형준 시인은 순간의 사랑에 매달린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볼 수 없다면 미래의 성공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라고 반문한다. 행복은 진정 이 순간을 사랑함에서 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신현림 시인은 뭐든 쉽게 잊히는 세상에서 쉽게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시간을 쌓아가고 싶다. 그 아름다운 시간들을 통해 얻은 삶의 진실들로 내 생의 의복을 만들어가고 싶다.’ 라고 자기 속마음을 드러낸다. 권혁웅 시인이 사랑하는 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동어반복이야말로 모든 시에 내재한 동력일 것이다.’ 라고 덧붙인다.

박주택 시인이 깨어나리라. 열망에 힘입어 낮이 스스로의 운명에 미소를 지어 보이고, 비애에 잠긴 밤이 생의 바닥으로부터 숨을 뿜어 올리듯이라고 외친다. 그런데 손택수 시인은 빈 곳이 있어야 소리가 울리듯 침묵은 음악과 시가 탄생하는 장소라고 입을 막는다. ‘우리는 어린 날의 고적한 뒤란으로 돌아가듯 침묵으로 귀환함으로써 세계의 실감나는 반응체로 거듭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승희 시인은 답장이 없어도 쓴다. ‘이제 답장 같은 거 나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쓴다. 나는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가. 그건 분명하다. 너에게. 세상의 수많은 너라는 사람들이면 된다.’ 라고 혼자 다짐한다. 허연 시인은 모든 시는 불온하고 모든 시는 제멋대로 쓰여져야 한다. 모든 시는 그즈음의 외마디 비명이다.’ 라고 하면서도 세상이 그것들을 꼭 받아줘야 할 책무는 없단다.

유홍준 시인은 규격화된 제품만을 요구하는 공장에서 내 시는 잘못 생산된 불량품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규격화된 것들은 다 이제 잊히고 없는데 어쩌자고 내가 만든 이 불량품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 라고 자문한다. 이재무 시인이 그 곁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무언가에 쫓겨 늘 바지런히 앞만 보고 걷다가 무심코 뒤돌아보면 거기 시가 땀에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날들이 많았다. 그런 시가 안쓰러워 떨쳐내지 못하고 조강지처인 양 여직 품어다니고 있다.’ 이민하 시인은 시를 두고 뒤를 향해 걸어도 앞으로 가는 길이며, 멈추어 있어도 끝나가는 삶이라고 푸념한다. 이영주 시인은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순간이라는 결정체가 남기고 간 흔적의 물질을 쫓는 일이라고 가르쳐준다. 그러면서 그는 남들이 말하는 잘사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쓸데없는 일이라며 웃는다. 정병근 시인은 내 인생은 시로 망쳤다. 기꺼이 자초한 일이므로 후회하지 않는다. 무엇으로든 망치지 않은 인생이 있으랴.’ 라고 하늘을 쳐다본다.

시는 인간의 심성 그 자체를 내용과 형식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나는 아는 체를 많이 한다. 시는 그것을 애써 찾아 읽는 사람에게만 충만한 기쁨을 주며, 자기 자신의 삶을 보다 높은 존재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초월의 힘을 발휘한다. 내가 시를 강조하는 이유는 시가 인간의 아름다운 심성으로부터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시의 기본적인 원리가 아닌가? 시는 마음을 말한 것(詩言志)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거기서 비롯된다. 공자의 말씀에도 시 삼백 편에 생각의 간특함이 없다.” 고 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사뭇 다르다. 삶은 각박하고 사람들은 매우 거칠다. 여기서 시를 운위한다는 것 자체가 한가로운 일처럼 보인다. 시는 오로지 시인들만의 몫이고, 일상의 인간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으니! 이러한 현상을 놓고 사람들은 흔히 시의 위기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의 위기를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자체가 정서적 파탄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 정신을 회복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시인으로 사는 길만큼 아득하다. 하지만 시인은 시를 찾는 사람의 곁에만 자리한다. 그리고 천상(天上)의 언어를 인간의 말로 노래한다. 그래서 시인이다. (권영민)

* 이 글은 <시인으로 산다는 것>(문학사상, 강은교 외)의 머리말임.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미국에서 영어로 발간되고 있는 여러 문학지에 시조시인 조오현의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번역 소개되면서 화제를 낳고 있다. 미국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발간되고 있는 전통 있는 문예지 <WORLD LITERATURE TODAY>는 지난해 9월호에 조오현의 시조 오늘, 달마, 고목의 소리등을 번역 소개하였다. 이 잡지는 1927년 창간된 문예지로서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종합지 <NEW YORKER>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잡지의 하나로 손꼽힌다. 월간지 형태로 간행되고 있는 이 잡지는 영어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명 문학인들의 신작을 소개하면서 다양한 문학적 이슈를 다루고 있다. 비영어권 문학인의 작품도 특집형식으로 번역소개하고 있다. 온라인 계간 문예지인 < THE ADIRONDACK REVIEW>2013년 가을호에 조오현의 산문시 갈매기와 바다-절간이야기 2」 「다람쥐 두 마리- 절간 이갸기 3, 청개구리-절간 이야기 29등을 집중 소개하였다. 이 잡지는 2000년에 설립된 온라인 계간지로서 시와 소설 그리고 사진 예술 등을 다루는 고급 문예지이다.

조오현의 시조와 시 작품들을 이들 잡지에 번역 소개한 것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인즈 펜클(Heinz Insu Fenkl) 교수이다. 펜클 교수는 미국 뉴욕주립대학(New Paltz) 영문학과 부교수로서 이 대학에서 신화학과 문예창작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그는 1997년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첫 소설 <Memories of My Ghost Brother>를 내면서 대단한 신인 작가로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으며, 최근 두 번째 소설 <Shadows Bend>를 발표하면서 문학적 위상을 굳건히 하고 있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모친이 지어준 한국식 이름 인수를 자기 이름에 꼭 붙여 쓰기도 하면서 한국의 전통문화에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Davis)에서 공부한 그는 풀브라이트 연구기금으로 한국에 나와 연구 활동을 하기도 했고 지금은 대학 강의 이외에도 여러 잡지에 자신의 이름으로 고정 칼럼을 쓰면서 한국 문화를 미국에 소개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펜클 교수는 불교적인 선()의 세계를 시조와 산문시를 통해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조오현의 작품들을 주목하면서 2012년 봄부터 아시아 문학의 세계적인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ASIA LITERARY REVIEW>바위 소리등의 시조를 번역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 불교시 전문지인 <BUDDHIST POETRY REVIEW>201212월호에 시조 춤 그리고 법뢰(法雷), 떡느릅나무의 달등을 번역 수록했다. 생태주의 시전문지인 <WRITTEN RIVER>2012년 겨울호에도 허수아비등의 시조를 집중 소개했다. 그는 최근 문학사상에서 발간한 <적멸을 위하여 조오현문학전집>의 영어 번역본 출간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펜클 교수가 특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조오현의 시조가 불교적인 선의 세계에서 중심개념이 되고 있는 ()’이나 ()’과 같은 추상적인 요소를 짧은 시적 형식에 담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점이다. 펜클 교수는 조오현의 시조에서 볼 수 있는 시조의 시 형식과 불교 정신의 교묘한 결합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조오현의 시조가 세계적인 불교시로서 최고의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조시인 조오현은 설악산 신흥사의 조실 스님으로 불교계의 큰어른 중 한 분이다. 해마다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열리는 만해축전을 주관하면서 만해 한용운의 평화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노력해 왔다. 특히 1960년대 말부터 시조 창작에 관심을 보이면서 한국문학에서 시조의 의미와 그 정신을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는 점을 앞장서서 강조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개최된 하버드 시조 축제에도 특별 초대되었던 적이 있다. 펜클 교수의 번역 작업을 통해 <적멸을 위하여 조오현문학전집>의 영역본이 출간되면 세계의 독자들이 불교의 정신과 시조 형식의 조화를 이룩해낸 조오현의 문학세계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조오현의 시조 허수아비를 다시 읽어보면 펜클 교수를 매료시킨 그 문학의 정신적 높이를 짐작할 수 있다.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 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 주고

남의 논일을 하면서 웃고 있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논두렁 밟고 서면-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가을 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맘 다 비우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적멸을 위하여 조오현문학전집, 문학사상, 148)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베스트셀러는 글자 그대로 잘 팔리는 책을 말한다. 미국의 뉴욕타임즈가 매주 발표하는 베스트셀러 목록이 유명하다. 일반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된 책의 부수를 조사하여 통계를 내고 소설비소설부문을 나누어 발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형 서점들이 자기네 서점에서 많이 팔려나간 책을 조사하여 베스트셀러 목록을 만든다. 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독자들이 일정 기간 동안 어떤 종류의 책을 사서 읽고 있는지 그 경향을 알 수가 있고, 출판사가 발행하고 있는 신간들 가운데 어떤 책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책들을 초판의 경우 양장본으로 제작한다. 이 양장본 책은 정가가 비싸지만 대개 도서관에서 먼저 구입한다. 이런 방식이 제도화되어 있으니 출판사가 책의 제작에 드는 초기 비용을 어느 정도 보전할 수 있다. 물론 일반 독자들도 이 양장본을 사서 보는 경우가 많다. 일정한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출판된 지 일주일 안에 2만부 이상 팔리는 책이라면 대개 베스트셀러로 인정된다. 그러면 출판사에서는 반양장으로 보급판을 만들어 가격을 낮추어 일반 독자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출판 시장이 큰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가 사회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나 베스트셀러는 그 책의 학술적 가치나 예술적 수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책이 많이 팔린다는 것이 책의 내용이나 질에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베스트셀러 가운데에는 오랜 세월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꾸준히 팔려나가는 고전적인 양서가 된 것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엄청난 판매부수를 자랑하던 베스트셀러가 일정 시기가 지난 후 그대로 사라져버린 경우를 얼마든지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베스트셀러 목록은 그 자체가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책의 제목과 함께 저자와 출판사만 표시된다. 그 책을 사서 읽는 독자층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왜 그 책을 사는지도 알 수 없으며, 어느 지역에서 그 책이 많이 팔렸는지도 확인이 불가능하다. 베스트셀러는 오직 목록으로만 존재할 뿐 그 책의 실체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책은 일반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독자들 가운데 이 목록을 보고 호기심에 끌려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상업적 출판사들이 많은 돈을 쓰면서 자기네 출판사의 책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리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출판사는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해 책의 제본 방식이라든지 표지 디자인도 색다르게 고안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책의 판매 가격을 책정하는 데에까지 신경을 쓴다.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책을 광고하고 책의 저자를 언론에 노출시켜 대중적 관심을 모으려고 노력한다.

최근 상당한 재력을 가진 중견 출판사가 유명 문인들의 소설을 출간한 후 그 책을 사재기하여 베스트셀러로 조작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기도 하였다. 자기네가 출판한 책을 서점에 내놓은 후 이를 비밀리에 대량 구매하여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씁쓸한 이야기다. 근래 도서시장이 얼어붙어 있는 현실과도 연관되는 문제이지만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낳았다는 생각이 든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책을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하다. 좋은 책은 그것을 찾는 독자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권영민)

'문학의 주변 > 권영민의 문단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으로 산다는 것  (0) 2014.04.19
세계로 소개되고 있는 시조시인 조오현  (0) 2014.02.25
베스트셀러의 허상  (0) 2013.12.18
신춘문예의 계절  (0) 2013.12.10
캐나다 단편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0) 2013.11.07
가갸날  (0) 2013.10.24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해마다 연말이 되면 중요 신문들이 큰 상금을 내걸고 문학작품을 공모한다. ‘신춘문예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 이 문단 행사는 문학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늘 아득하다.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신춘문예를 기다리며 작품을 가다듬고 여기저기 신문에 투고한다. 그리고는 얼마나 가슴조리면서 신년 첫날의 발표를 기다리는지 이 열병을 치루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문학의 길을 향한 통과의례를 이렇게 유별나게 치루는 나라는 달리 없을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상금을 내걸고 문학 작품을 공모한 것은 최남선(崔南善)이 주재했던 잡지 청춘(靑春)이 처음이다. 이 잡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1914년에 종합 월간 문예지로 출발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발흥하려는 신문단에 의미 있는 파란을 기대한다는 목표 아래 현상문예란을 만들어 독자의 작품을 모집한 적이 있다. 그런데 1920년대 중반부터 민간 신문들이 신춘문예라는 이름으로 문예작품을 현상 공모하고 그 결과를 연초에 발표하면서 하나의 문단적 제도로 정착했다.

요즘도 중요 신문사들은 신춘문예 제도를 대부분 운영한다. 전에는 일부 잡지사에서도 신춘문예라는 이름으로 문학작품을 공모했지만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신문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신춘문예를 보면 시, 소설, 희곡, 평론 등 각 분야별로 작품을 공모하여 이를 권위 있는 심사위원들에게 심사하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매년 신년호에 각 부문별 당선작을 발표한다. 당선작에게는 상당한 상금이 돌아가지만 상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선작을 낸 사람을 곧바로 문필가로 대우한다는 점이다. 신문사가 신춘문예라는 제도를 공정하게 운영하면서 역량 있는 신인 발굴의 등용문을 만들어주고 있는 셈이다.

우리 문학계의 거장들 가운데에는 신춘문예를 통과한 사람들이 많다. 소설가 김동리는 1934년 시 백로(白鷺)가 신춘문예에 입선된 후 1935년 단편소설 화랑(花郎)의 후예(後裔)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단편소설 산화(山火)1936년 다시 신춘문예에 당선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소설가 김유정의 경우는 1935년 소설 소낙비노다지가 각각 다른 두 군데 신문사의 신춘문예를 석권함으로써 문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인 서정주도 1936년 시 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하였다. 최근에 세상을 떠난 작가 최인호도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고, 그 후 화려한 명성을 이어갔다. 소설가 황석영, 이문열, 오정희 등도 모두 신춘문예를 통과한 후 유명한 작가로 성장했다.

그런데 신춘문예는 그 당선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름을 제대로 문단에 알리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신춘문예 당선보다 그 영예를 지키면서 좋은 글을 계속 써나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운이 좋게 당선된다고 하더라도 문학을 한다면서 어떻게 운수에만 매달릴 수 있겠는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문학인으로서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피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신춘문예 지망생들은 이 점을 꼭 마음속에 담아두어야 한다.

신춘문예의 열기가 문단 진출 방식이 다양해졌음에도 여전히 뜨겁다. 여기저기 문학창작교실을 두드리는 사람들도 많고, 인터넷에 신춘문예 준비생들의 모임까지 생겼단다. 모두가 살기 어렵다고 야단인데 문학을 향한 열정이 아직 한 구석에 남아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신춘문예 당선을 위한 묘책은 없다. 자기만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 이번 신춘문예에서는 패기 있는 목소리의 새로운 얼굴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권영민, 2013.11.11)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스웨덴 한림원은 2013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캐나다의 여성 작가 앨리스 먼로를 선정했다. 북아메리카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로 손꼽히고 있는 먼로를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스웨덴 한림원은 우리 시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고 소개하였다. 노벨 문학상의 역사상 여성 수상자로서는 열세 번째이며, 캐나다 문인 가운데 최초의 수상자이다. 영국의 BBC와 미국 뉴욕 타임즈 등을 비롯한 세계의 언론들은 먼로의 문학이 가장 비정치적이면서도 가장 비상업적임을 주목하면서 그녀의 수상을 일제히 환호하였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은 우리 독자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녀의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 떠남,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등이 이미 국내에도 번역 출판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로는 1931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십 대의 소녀시절부터 단편을 쓰기 시작했다. 웨스턴오하이오 대학에 재학 중이던 때에 첫 단편 그림자의 세계를 발표하였고, 30대 후반에 펴낸 첫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1968)이 캐나다 <총독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먼로는 장편소설 소녀와 여성의 삶을 발표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 작품이 미국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로 각색되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미국의 독자들에게도 친숙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단편소설 쓰기에 모든 열정을 바쳤으며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말하려 했던 것, 공공연한 비밀, 떠남등을 비롯한 열두 권의 단편집을 출판하였다.

외신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엘리스 먼로의 대표작들은 전 세계 13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상복도 많다. 캐나다 최고의 문학상으로 불리는 <총독문학상>을 세 차례나 수상한 그녀는 미국에서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과 단편소설 부문의 최고상으로 손꼽히는 <오 헨리 상>을 받았다. 소설가로서 앨리스 먼로의 문학적 업적이 국제적으로 높이 평가를 받게 되자 2009<맨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의 영예도 그녀가 차지하였다. 당시 맨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한 작가가 평생에 걸쳐 이룩하는 작품의 깊이와 지혜, 그리고 정밀성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작품마다에서 그대로 성취해 냈다.”라고 선정 경위를 밝히기도 하였다. 평생을 두고 단편 창작에 몰두해 온 앨리스 먼로는 하나하나의 짧은 이야기 속에 인간의 삶의 복잡한 무늬들을 섬세한 관찰력과 탁월한 구성으로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앨리스 먼로의 노벨상 수상을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가 캐나다의 체홉이라고 칭송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평가는 우리 작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에도 미국의 오 헨리상처럼 단편소설만을 대상으로 하는 이상문학상이 있다. 한국 단편소설 문학의 전통을 살려나가기 위해 최고의 예술적 완성을 보이면서 기법적 도전에 성공한 작품을 엄격하게 선정한다. 역대 이상문학상의 수상작들이 한국문학 최고의 반열에 올라서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런데 장편을 선호하는 출판시장의 요구로 인하여 최근 우리 단편소설은 그 상상력에 활기를 잃고 있다. 우리 작가들도 소재에 대한 호기심과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장편소설에만 매달리지 말고, 단편소설의 예술적 완결성에 더욱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소설이 기법적 완결과 예술성을 등한시한다면 그것은 한낱 이야깃거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권영민)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