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노천명의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

 

 

 

1

 

[창변(窓邊)]은 노천명(盧天命)의 두 번째 시집이다. 해방 직전 19452월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노천명은 매일신보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으로 우리말로 책을 내기 어려웠던 점을 생각한다면 태평양전쟁이 최고의 고비에 이르던 시기에 이 시집의 출간이 이루어진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지(韓紙)로 인쇄된 이 시집에는 모두 29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노천명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수 있는 작품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남사당을 비롯한 장날, 연자간, 잔치, 돌잡이등은 토속적 풍물에 녹아들어 있는 삶의 애환을 풍부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초기 시를 대표하는 사슴과 동궤에 있는 자화상, 창변, 등에서 확인되는 시적 자기 인식과 그 절제의 미학도 주목된다. 푸른 오월, 사월의 노래, 보리등에서 드러나는 대상에 대한 감각적 묘사와 관능미는 자연을 통해 본원적인 생명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인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1938)에서 볼 수 있는 시인 특유의 자의식과 섬세한 감각이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노천명의 남사당을 보면 남사당 패거리의 떠돌이 생활과 그 뒤에 숨겨진 삶의 비애가 정감있게 그려져 있다. 이 시가 보여주는 토속적인 풍물에 대한 묘사의 사실성은 1930년대 후반 시단에서 하나의 유행처럼 자리잡은 이른바 풍물시의 특성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얼굴에 분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따 내리는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려

램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된다

 

산 너머 지나온 저 촌엔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와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이 시에서 시적화자인 삐리라고 불렸던 초입이다. 원래 남사당패 안에서는 패거리에 가담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입자들이 각자의 특기에 따라 연기를 익히면서 잔심부름까지 도맡아한다. 그런데 이들은 특기를 연마하여 연행자로 나설 때까지 대개 여장(女裝)을 한다. 실제로 시의 텍스트에서 시적화자인 는 향단이 복색의 여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 시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1연에서 3연까지를 보면, 남사당 패거리 안에서 라는 시적화자가 수행해야 하는 성역할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분을 바른 얼굴, 길게 따 내린 삼단 같은 머리, 다홍치마 등을 통해 여장한 자신의 겉모습이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이 겉모습은 구경꾼들을 위한 분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패거리 내부에서의 자신의 성역할을 암시한다. ‘램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된다라는 구절은 스스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애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시적 화자의 자의식을 드러내어 주고 있다. 물론 는 자신만의 특기로 어떤 기예를 연마할 때까지 이 굴욕의 세월을 견뎌야 한다.

이 시에서 4연 이하의 후반부는 남사당패의 유랑의 삶이 그려지고 있다.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펼쳐야 하는 이들의 고달픈 삶과 거기 스며들어 있는 비애를 엿볼 수가 있다. 시적화자는 산 너머 지나온 저 촌엔 /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그 처녀에게 자신의 정분을 표시할 수 없다. 누구든 남사당패에 들어오면 평생을 이 패거리들과 함께 떠돌며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화자인 를 통해 남사당패의 일원으로서의 성역할과 실제의 성정체성이 분리 도치되는 현상을 간취하고 있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는 남사당패 안에서 여성으로 분장하고 지내지만, 실제로는 산 너머 마을에서 눈여겨보았던 처녀에 대한 그리움을 지닌 남성임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애틋한 사랑의 정은 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연이 끝난 다음날에는 다시 다른 동네를 찾아 떠나야 하는 신세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남사당 패거리를 그려낸 단순한 풍물시는 아니다. 남사당패의 일원이 되어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한 인물을 시적화자로 설정하고 그 내면적 갈등과 비애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천명의 남사당을 읽으면서 수년전에 작고한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 쓴 <남사당패연구>라는 책을 다시 넘겨보았다. 이 시의 시적화자의 성역할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남사당(男寺黨)은 남자들로 구성된 떠돌이 예인집단이다. 조선 후기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놀이패로서 마을을 떠돌면서 각종 기예를 보여주었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 꽤나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던 남사당에 대해서는 문헌상의 기록이 별로 없단다. 어디서 어떤 형태로 이러한 특징적인 유랑(流浪) 예인집단(藝人集團)이 생겨났는지를 기록상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남사당패는 그 집단의 우두머리를 꼭두쇠라고 하며 이를 중심으로 수십 명의 놀이패가 움직인다. 이들은 흔히 볼 수 있는 농악과 같은 풍물놀이, ‘버나라고 하는 대접 돌리기 기술, ‘살판이라고 하는 땅재주, ‘어름이라고 부르는 줄타기, 탈놀음을 말하는 덧뵈기덜미라는 꼭두각시놀음 등의 놀이를 연기한다. 대개는 마을에서 이들의 놀이를 허용하면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인다. 특별한 보수는 없으며 숙식 정도를 해결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놀이판이 다 끝나면 다른 마을로 옮겨간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남사당패가 남자로만 구성되어 있는 내부적으로 일종의 남색조직(男色組織)이라는 점이다. 이 조직에 처음 입문한 초입자(나이 어린 삐리)가 여성 구실을 감당하면서 상급자의 암동모가 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노천명의 남사당에 등장하는 라는 시적화자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바깥으로는 여장을 한 채로 구경꾼들의 흥취를 돋우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 초입자가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다. 이 같은 남사당패의 특이한 조직을 알아야만 이 시의 시적 정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남사당패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조선시대 지배층의 시각으로는 남사당패가 한낱 풍속을 해치고 도덕을 무너뜨리는 패속패륜집단(敗俗悖倫集團)으로 보였을 것임은 물론이다.

 

3

 

시인 노천명(盧天命, 1911-1957)은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 서울로 올라와 진명여학교를 졸업하였고 1930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화여전 재학 중 19326월 잡지 신동아에 시 밤의 찬미, 단상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본격적인 문단활동은 1935시원(詩苑)동인으로 참여하여 시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화여전 졸업 후 1934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해 1937년까지 근무했으며, 1939년까지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으면서 활발한 시작 활동을 했다.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1938)에는 시인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낸 작품들이 많으며, 시인 자신의 고독한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탐구하는 시들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집에 시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시 사슴등이 있다. 일제 말기에 매일신보사 기자로 활동하였고, 친일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맡으면서 친일적 문필활동에 앞장섰다. 해방 직전 출간한 두 번째 시집 󰡔창변󰡕(1945)에는 노천명의 시 세계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이 많이 실려 있다.

1945년 광복 후 서울신문사 등에서 일했고, 임화 김남천 이태준 김기림 등이 주도하던 좌익문단의 조선문학가동맹에도 참여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좌익 활동이 문제가 되어 전쟁 직후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광섭, 이헌구 등의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6개월만에 출감하였다.

한국전쟁 직후에 발간한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에서는 앞서 보여주었던 고독한 자아의 모습이 한층 심화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말기의 친일 훼절행위와 한국전쟁 중의 부역혐의에 대한 자기비판과 내적 갈등, 옥중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내성적인 주제와 자기 관조의 세계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에는 개인적 서정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노천명의 주된 시적 경향과는 달리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가톨릭에 입교하였으며 독신으로 살면서 1957년 뇌빈혈로 사망할 때까지 꾸준히 시를 창작했다.

노천명의 시는 뛰어난 언어 감각과 서정적 감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노천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으로서의 시인의 길을 헛디뎠다. 세련된 시적 감각을 지녔던 이 여성 시인은 자신을 향하여 밀려오는 모든 유혹과 강요를 뿌리칠 힘을 갖지는 못했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요구에 따라야 했고, 일본군에 강제 징발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대일본제국을 위해 쓰러져간 조선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써야만 했다. 이로 인하여 노천명의 이름 앞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는 좌익 문단에 가담하여 정치시대의 이념적 요구를 따랐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서울에 인민군이 진입하게 되었을 때 노천명은 피난길을 놓치고 서울에 숨어 있다가 인민군에게 발각되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 노천명을 인민군은 자신들의 문화선전에 앞장세웠다. 노천명은 여기서도 그들의 요구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노천명은 경찰에 체포되었고 북한 공산당과 인민군에 협력한 부역자가 되었다. 이 엄청난 시련을 시인이라는 천명으로만 돌리기에는 너무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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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의 첫 시집 산도화(山桃花)

 

 

산도화는 청록파 시인 박목월(朴木月)이 해방 이후 출간한 첫 시집이다. 이 시집은 서울 영웅출판사라는 작은 출판사에서 발간했는데, 시집의 판형은 B6판이며 전체 126면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집의 첫머리에는 시인 박목월 자신이 쓴 해제가 머리말처럼 실려 있다. 본문의 말미에는 청록파의 조지훈(趙芝薰)과 박두진(朴斗鎭)이 쓴 발문이 붙어 있다. 오랜 문우였던 시인 황금찬(黃錦燦)도 이 시집에 발문이 썼다. 조지훈은 발문에서 일제 말기 <문장> 지의 추천을 받은 후 두 사람이 경주 부근 건천에서 처음 만나 문학적 동지로서 함께 해온 사연을 감동적으로 적어놓고 있다.

박목월은 해방 직후 자신의 고향인 경주를 떠나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대구의 계성학교에서 가르쳤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화여자고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으며, 1946년 결성된 한국청년문학가협회에 김동리 조지훈 등과 함께 참여했고 한국문인협회 출범에도 참여했다. 한국전쟁 후에는 한때 출판사 창조사(創造社) 등을 경영하기도 하였고, 잡지 아동(1946)·동화(1947)·여학생(1949) 등을 편집, 간행하면서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다. 시집 산도화는 이와 같은 해방 이후 문단 활동의 정리작업에 해당한다.

시집 산도화에는 시인이 해방 전후에 쓴 총 35편의 시가 전체 6부로 나누어져 실려 있다. 1부에는 구강산(九江山) 1, 한석산(寒石山), 산도화 1. 2. 38, 2부에는 산색(山色), 윤사월, 청노루, 나그네6, 3부에는 모란여정(牡丹餘情), 여운(餘韻), 해으름6, 4부에는 구름밭에서, 산이 날 에워싸고6, 5부에는 임에게 15, 6부에는 월야(月夜)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일상적 언어를 통해 산, 바위, , 꽃 등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섬세하게 묘사해내고 있으며, 절제된 감정을 바탕으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감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시적 이미지의 공간적 배치를 통한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민요풍에 가까운 자연스런 리듬을 함께 살려낸 점은 주목할 만하다.

 

2

 

조지훈이 쓴 이 시집의 발문에는 박목월과 조지훈이 처음 만나게 된 사연이 소개되어 있다. 두 시인의 문학청년 시절의 풋풋한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아름답다.

 

내가 목월을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이른 봄이었다. 그 전에 나는 절간에서 일본의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들었고 문장폐간호를 받았다. 그해 겨울 과음한 탓으로 빈사의 몸으로 서울에 와서 이른바 국민문학이 발간된 것을 보았고 몇 달 누워 있다가 이듬해 봄에 조선어학회의 큰사전편찬을 돕고 있을 때였다. 일본서 돌아오는 초면의 시인이 하나 화동에 있는 조선어학회를 찾아와서 오는 길에 목월을 만나고 왔다는 말을 전했었다. 그때까지 경주를 못 보았을 뿐 아니라 겸하여 목월도 만나고 싶고 해서 나는 그 이튿날 목월에게 편지를 썼다. 무슨 말을 썼는지 지금은 모르지만 매우 긴 편지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얼마 뒤에 목월에게서 답장이 왔었다. 그 짧으면서도 면면한 정회가 서려 있는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경주 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 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이 짧은 글을 받고 나는 이내 전보를 쳤었다.                                                                                                                  (조지훈, 산도화 발문)

 

조지훈이 목월을 찾아 경주로 내려오던 날 아침부터 하늘에서는 봄비가 분분하게 흩뿌렸다. 목월은 지훈을 만난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 전날 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일찌감치 건천역으로 나가 지훈을 기다렸다.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금융조합 서기로 일하고 있던 그는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부끄러웠다. 시를 쓴댔자 그것을 발표할 길이 없었다. 모든 잡지와 신문이 폐간 당한 터라서 그는 중앙문단에서 제대로 이름조차 알리지 못한 채 시골 생활에 빠져 있었다. 그가 경주에서 가끔 만났던 문인은 당시 소설가로 이름이 나 있던 김동리였다.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하고 있던 김동리는 갓 시인이 된 박목월과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문우였다. 그런데 낯모르는 시인 조지훈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리고 경주로 내려와 그를 만나겠다는 것이다. 목월은 조지훈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와의 만남을 소중한 추억으로 회상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경주에 있는 나에게 하루는 편지가 왔다. 봄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처럼 멋이 있으면서 단아한 지훈의 필체로 넉 장 정도의 긴 편지였다. 시인다운 우아한 사연의 그 편지를 6.25 사변 때 잃어버린 것이 내게는 두고두고 한이었다. 내가 회답을 보낸 얼마 후 그는 나를 찾아 경주로 왔다. 긴 머리가 밤물결처럼 출렁거리던 그의 첫 인상은 시인이기보다는 귀공자 같았다. 티 없이 희고 맑은 이마, 그 서글서글한 눈- 나는 서울에서 온 시우를 맞아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지훈을 애도하며)

 

그날 해질 무렵 건천역에 기차가 들어섰다. 박목월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지훈이 자신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까를 걱정하며, 전날 밤 한지에 박목월이라고 자기 이름을 써 두었다. 그리고 역으로 나가면서 그 종이를 챙겼다. 그는 역 앞에서 자기 이름을 쓴 한지를 깃대처럼 쳐들고는 지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큰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시골 아낙네 서넛과 촌로 두엇이 플랫 홈에 내렸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지훈이 천천히 기차에서 내려섰다. 목월은 자신이 들고 서 있던 깃대를 흔들 필요도 없이 단박에 시인 조지훈을 알아챘다. 긴 머리를 날리면서 기차에서 내린 지훈은 저녁 무렵 설핏한 기운 속에서도 훤칠한 키에 수려한 면모가 돋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 얼싸 안았다. 그렇게 이곳 건천역에서 둘은 처음 만났다. 암흑의 시대를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젊은 두 시인은 폐허의 고도 경주의 여사(旅舍)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문학 이야기로 시작하여 둘의 대화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갔다. 조지훈은 시인으로서의 존재를 이렇게 따뜻하게 지키고자 하는 목월이 고마웠다.

 

3

 

시집 산도화표제작인 산도화 1은 박목월의 초기시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절약된 언어와 간결한 형식, 선명한 이미지의 공간적 배치 등은 박목월의 초기시의 중요한 특징이다. 주관적 감정의 표현을 배제하고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묘사에 치중하는 방법은 정지용 이후의 현대시의 경향과 맥락을 같이한다. 시인 자신은 자연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적료의 풍경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세계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보랏빛의 석산(石山)과 대비되는 산도화의 색깔이라든지 옥 같은 물빛 등은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그대로 전달한다. 그리고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산도화, 봄눈 녹아 흘러내리는 물, 계곡에 나타난 암사슴의 모습 등을 통해 자연 그 자체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그려내고 있다.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랏빛 석산(石山)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산도화 1

이 작품에서 시의 제재가 된 산도화는 한국의 산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복숭아꽃이다. 일반에서는 개복숭아꽃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 봄에 연분홍의 꽃이 피어난다. 그러나 시적 진술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구강산이라는 산은 실제로 존재하는 산은 아니다. 시인 자신이 상상적으로 구상해 놓은 마음속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음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산도화사슴이다. 보라빛을 띠고 있는 구강산 기슭에 산복숭아꽃이 두어 송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봄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사슴 한 마리가 봄눈 녹아내리는 물에 발을 담그고 서 있다. 이런 장면은 상상적으로 가능하다.

이 시의 진술은 서경(敍景)을 위주로 하고 있다. 섬세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와 같은 경치를 실제로 찾아볼 수는 없다. 시적 화자는 일체의 주관적 감정을 절제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대상을 그려내고 있다. 보랏빛의 산, 두어 송이 벌어진 산도화, 산골 개울가의 암사슴은 인간의 세계와는 떨어져 있는 아늑한 자연의 비경(秘境)이다. 디테일에 대한 과감한 생략은 간결한 언어 표현을 통해 확인된다. 시적 공간에 오롯하게 남겨진 것이 산과 산도화와 사슴뿐이니, 봄이 찾아온 자연의 풍경치고는 모든 사물이 너무 단순하게 처리된 느낌이다. 이 단순성이 추상(抽象)의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구강산은 하나의 신비로운 이상향처럼 시를 통해 살아난다.

어떤 이는 박목월의 초기 시들이 마치 민화(民畵) 속의 장면을 그려낸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짤막한 어구로 이어지는 시적 진술에서 석산(石山)의 보랏빛과 산도화의 색깔, 물빛 등은 선명한 색상의 대비를 이룬다. 1, 2연은 보랏빛 석산과 연분홍의 산복숭아꽃이 조화를 이룬다. 시적 대상 자체는 아늑함 속에서 정적(靜的)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3, 4연은 그 느낌이 약간 다르다. 눈이 녹아내리는 옥빛 개울물은 작지만 동적(動的)인 이미지를 구현한다. 그리고 거기 발을 담그고 서 있는 암사슴의 모습이 포착된다. 시적 텍스트의 전반부 1, 2연이 보여주는 정적인 느낌과 3, 4연에서 확인되는 개울물의 작은 움직임이 서로 대조를 이루면서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된 셈이다.

박목월의 초기 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산도화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시적 재창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과 자연의 풍경이 한데 어우러진 것은 아니지만 산도화의 풍경은 시인이 동경하고 있는 이상적인 공간임에 틀림없다. 산도화 2산도화 3을 함께 읽어보면 간결한 언어가 만들어내는 섬세하고도 감각적인 표현의 시적 성취를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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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시집 [초토(焦土)의 시]

 

 

 

[초토(焦土)의 시]는 시인 구상(具常, 1919-2004)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은 195612월 대구 청구출판사에서 발간했다. 시집 형태는 B6, 48면으로 이루어진 작은 책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은 모두 15편인데, 책의 제목과 동일한 하나의 연작시초토의 시로 이어져 있다.

이 시집의 표지화는 구상의 친구였던 화가 이중섭이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중섭은 한국전쟁 당시 원산에서 부산으로 가족을 이끌고 피난했고 부산, 제주도, 통영 등지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955년 자신이 꿈꾸었던 개인전을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최했다. 서울 전시가 끝난 후 그는 구상의 권유에 따라 대구에서 다시 개인전을 열었다. 이중섭의 대구 개인전이 열렸을 때 구상은 그의 시집 [초토의 시]의 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중섭은 구상을 위해 그 시집의 표지화를 그렸다.

이중섭이 그린 시집 [초토의 시]의 표지화는 물고기와 아이들의 형상이 다양하게 포개져 놓여 있다. 노랑색의 바탕에 선묘의 방식으로 간략하게 터치한 이 그림은 아이들의 표정도 밝고 부드럽다. 그러면서도 생동감이 넘쳐난다. 서로 얽혀 이어진 아이들과 물고기의 모습 속에 약동하는 생명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중섭은 이 표지화를 구상에게 전하고 자기 미술을 위해 더 넓은 무대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지만 경제적 궁핍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건강이 나빠지면서 극도의 신경쇠약에 정신분열 증세까지 보이다가 결국 1956년 가을에 세상을 떠났다.

시집 [초토의 시]는 시인 구상의 오랜 친구이자 천재적 예술가였던 이중섭의 죽음 앞에 바치는 하나의 헌사였다. 이 시집은 이중섭의 그림으로 그 표지가 꾸며졌지만 이중섭은 이 시집의 발간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구상은 시집의 후기를 통해 당시의 심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동안 이 강토가 초토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내 심정은 보다 더 황폐해졌습니다. 더욱이나 칠죄(七罪)의 심연 속을 꼴닥꼴닥 헤매온 나의 영혼은 그야말로 문둥입니다. 진정 서럽고 부끄럽고 아파서 차라리 미쳐나 버렸으면 하는 맘 무시로 납니다. 그래서 이미 미친 것처럼 벌득벌득 자꼬만 웃어도 봅니다. 천진하고 무구한 향우(鄕友) 중섭은 이런 때에 나 보라는 듯이 가버리는군요.

이런 나를 지원하고 그 울혈(鬱血)을 토하기엔 별무신통 시밖에 없구요. 시 세계는 사연이 필요 없고 게다가 낭만적이어서 거뜬하단 말입니다. 그러나 말이 모자라요. (중략) 도야지 꼬리만한 시 몇 편 내놓으면서 변백(辨白)과 넋두리가 길어졌나 봅니다. 그저 형()을 불러 횡수설로 통정하며...

                                                                             -구상, [초토의 시]의 후기.

 

구상이 이중섭을 그의 시적 오브제로 끌어들인 것은 시집 [초토의 시]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중섭의 죽음 앞에 바쳐진 이 시집의 작품들은 그 연작의 형식을 통해 이중섭의 삶과 그 예술혼의 빛나는 성채에 다가서고 있다. [초토의 시]는 시인 자신이 직접 체험한 한국전쟁을 정서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16편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이 작품들은 전쟁이 몰고 온 비극적 참상을 초토(焦土)로 상징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이 불타버린 소멸의 공간을 통해 비인간적인 전쟁과 그 파괴의 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당시 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후시의 상당 부분이 깊이 빠져들었던 절망의 언어 대신에 허무주의적 감상을 벗어나 본질적으로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천착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연작시가 황폐한 시적 주체와 대상으로서의 현실세계를 상상력을 통해 통합하면서 보다 높은 시적 인식의 지평을 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 있다.

 

     (1)

      판자집 유리 딱지에

아이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다

내려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춘다.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달리는

소녀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초토의 시 1

 

(2)

내 가슴 동토 위에

시베리아 찬바람이 살을 에인다.

 

말라빠져 엉켜 뒹구는 잡초의 밭

쓰레기 구덩이엔

입 벌린 깡통, 밑 나간 레이션 박스,

찢어진 성조지(星條紙), 목 떨어진 유리병,

또 한구석엔 총 맞은 삽살개 시체,

전차의 이빨 자국이 난 밭고랑엔

말라 뻐드러진 고양이의 잔해,

 

저기 비빌 온상 같은 천막 앞

피묻은 바지가랑이가 걸린

철망 안을 오가며

양기 병정이 휙휙 휘파람을 불면

김치움 같은 땅속에서

노랗고 빨갛고 파란

원색의 스카프를 걸친 계집애들이

청개구리들처럼 고개를 내민다.

 

하늘이 갑자기

입에 시커먼 거품을 물고

갈가마귀 떼들이 후다닥 날아

찌푸린 산을 넘는데

 

나의 잔등의 미칠 듯한 이 개선(疥癬)!

나의 가슴을 치밀어 오르는 이 구토(嘔吐)!

어느 누구를 향한 것이냐?

                                        ―초토의 시 3

 

앞에 인용한 초토의 시 1은 시적 화자인 의 뒤를 따르는 그림자를 시적 전경(前景)에 배치한다. 그리고 그 뒤에 몇 개의 장면들이 겹쳐진다. 이 한 폭의 그림은 시의 형식을 통해 펼쳐낸 대구 시절 시인 구상의 내면 풍경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 시적 화자인 를 따르는 그림자가 등장한다. 이 그림자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살아있는 모습의 구체적 형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의 뒤를 따르다가 웃으며 앞장을 선 그림자는 시인 자신의 페르소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구상의 곁을 늘 따르던 친구 이중섭의 환영(幻影)으로 읽힌다. 이것은 판자집 유리 딱지에 / 아이들 얼굴이 / 불타는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다.’ 라고 하는 제1연의 내용을 통해서 쉽게 유추가 가능하다. 전란의 초토 위에서 궁핍한 삶에 쪼들리면서도 꿈을 잃지 않고 키워낸 화가 이중섭의 두 아들 모습이 거기에 어려 있기 때문이다. 청정무구의 시심으로 자신의 그림에 열중하다 처절하게 죽어간 화가 이중섭의 예술혼을 구상이 자신의 연작시의 맨 앞 장면에 내세우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삶의 고통 속에서도 예술의 궁극적인 가치에 매달렸던 이중섭은 형체 없는 그림자로 이 시 속에 등장하고 있지만, 시인은 판자집 유리딱지에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던 아이들을 통해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연작의 형식으로 이어진 초토의 시는 앞에 인용한 (2)의 경우처럼 전란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삶의 현실 자체를 사실적으로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양키 병정들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계집아이들이 폐허가 되어버린 삶의 터전 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이 비리의 현실에 구역질을 느끼면서도 그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거리에 넘쳐나는 양갈보’, 시인과 창녀가 함께 나뒹구는 골목, 이지러진 막노동꾼의 한숨, 암흑 같은 삶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초토의 시 9와 같은 작품에서는 저기 다가오는 불장마 속에서 /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 그러나 저기 꽃잎모양 스러져 가는 / 어린 양들과 한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라고 간절하게 기구하기도 한다. 연작의 형식이 지니는 시적 긴장과 이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초토의 시전란이 남겨둔 상처를 눈앞에 두고 그 고통을 초극함으로써 구원의 세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을 잘 드러낸다. 역사의 의미와 인간 존재의 궁극을 동시에 포괄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욕이 절대적 신앙의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은 시인 구상의 시세계의 견고함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자네가 간 후에도 이승은 험하기만 하이. 나의 마음도 고약만 하여지고 첫째 덧정 없어 이러다간 자네를 쉬이 따를 것도 같네만 극악무도(極惡無道)한 내가 간들 자네와 이승에서듯이 만나 즐길 겐가 하고 곰곰중일세.

 

깜짝 추위에 요새 며칠 감기로 누웠는데 망우리(忘憂里) 무덤 속의 자네 뼈다귀들도 달달거리거지나 않나 애가 달지만 이건 나의 괜스런 걱정이겠지. 어쨌든가 봄이 오면 잔디도 입히고 꽃이라도 가꾸어 줌세.

 

밖에 나가면 만나는 친구들마다 어두운 얼굴들이고 이석(利錫)이만은 당가를 들겠다고 벌쭉이지만 그도 너무나 억차서 그래보는 거겠지. 몸도 몸이려니와 마음이 추워서들 불 대신 술로 난로를 삼자니 거진 매일도릴세.

 

자네는 이제 모든 게 아무렇지도 않아 참 좋겠네. 어디 현몽(顯夢)이라도 하여 저승 소식 알려 줄 수 없나. 자네랑 나랑 친하지 않았나 왜.

                                                                                                ―초토의 시 14

 

앞에 인용한 초토의 시 14를 보면, 시인 구상이 시적 화자가 되어 죽어간 친구 이중섭을 직접 호명하고 있는 장면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시편은 연작시의 다른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시적 어조를 활용한다. 시적 화자는 망자가 된 이중섭의 바로 곁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어지러운 삶의 현실 속으로 다시 불러내면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는 진솔한 대화를 이어간다. ‘자네가 간 후에도 이승은 험하기만 하이.’로 시작되는 이 고백적 어투에는 슬픔과 회한이 짙게 묻어난다. 이중섭을 먼저 떠나보낸 후 시적 화자는 나의 마음도 고약만 하여지고 첫째 덧정 없어 이러다간 자네를 쉬이 따를 것도 같네라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자기 심정의 쓸쓸함을 표한다. 물론 봄이 되면 망우리 공동묘지의 무덤 위에 잔디를 입히고 꽃이라도 가꾸겠노라는 위로의 말도 전하지만 냉혹한 일상의 현실을 견디어 내기가 억차서 마음이 추워서 불 대신 술로 난로를 삼고있다며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한 마디의 대답도 듣지 못한 채 자네는 이제 모든 게 아무렇지도 않아 참 좋겠네.’ 라고 망자를 위로한다.

이중섭의 그림으로 표지가 꾸며진 시집 [초토의 시]는 이중섭이 죽은 뒤에야 발간되었다. 이중섭은 이 시집의 출간을 보지 못하였지만 구상은 이중섭의 죽음 앞에 하나의 비통한 헌사처럼 이 책을 바쳐야만 했다. 이 시집의 후기를 통해 시인 구상은 연작시초토의 시초토가 된 강토황폐한 시인의 심정이 서로 맞부딪치면서 빚어낸 울혈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 구상은 이 연작시편을 펴내면서 대구에서의 긴 피난생활을 마감한다. 대구의 작은 출판사였던 청구문화사에서 펴낸 시집 [초토의 시]는 시인 구상에게 있어서 비극적인 전쟁체험과 곤궁했던 피난시절의 기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화가 이중섭이 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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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시집 [진달래꽃](1925)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1925년 매문사(賣文社)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김소월이 생전에 간행한 유일한 시집이다.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으로는 1923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한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를 손꼽을 수 있다. 1924년에는 주요한의 [아름다운 새벽], 조명희의 [봄 잔디밧 위에], 박종화의 [흑방비곡], 변영로의 [조선의 마음], 노자영의 [처녀의 화환] 등이 나왔다. 김소월의 [진달래꽃]도 그 연대로 따진다면 초창기에 출간된 창작시집에 해당한다.

[진달래꽃]을 출간한 매문사는 김소월의 스승이기도 했던 시인 김억이 운영한 작은 출판사다. 김억은 19259월 자신의 제2시집 [봄의 노래]를 이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매문사의 [진달래꽃]은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 총판본이 널리 알려져 있다. 겉표지에 표제가 진달내꽃이라는 도안글씨로 표시되어 있으며 진달래꽃과 바위산이 채색화로 그려져 있는 양장본이다. 본문은 모두 234면이며 판형은 국판 크기의 절반에 해당하는 국반판(菊半版)이다. 시집의 서문이나 발문이 없으며, 본문에 총 127편의 시를 16부로 구분하여 실었다. 1님에게<먼 후일> · <풀따기> 10, 2봄밤<봄밤> · <꿈꾼 그 옛날> 4, 3두 사람<두 사람> · <못잊어>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8, 4무주공산(無主空山)’<> · <맘 켱기는 날> 8, 5한때 한해<어버이> · <잊었던 맘> 16, 6반달<가을 아침> · <가을 저녁에> 3, 7귀뚜라미<> · <님과 벗> 19, 8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 된다고<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 된다고> · <황촉불> 9, 9여름의 달밤<여름의 달밤> · <오는 봄> 3, 10바리운 몸<우리집> · <바리운 몸> 9, 11고독에<비난수하는 마음> · <초혼> 5, 12여수(旅愁)’, <여수> 1 · 2 2, 13진달래꽃<진달래꽃> · <접동새> · <산유화> 15, 14꽃 촉불 켜는 밤<꽃 촉불 켜는 밤> ·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10, 15금잔디, <금잔디> · <엄마야 누나야> 5, 16부에는 <닭은 꼬꾸요> 1편 등이다.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는 한국 근대시의 형성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 근대시의 성립과 함께 문제시되었던 새로운 시 형식의 추구를 염두에 둘 경우, 김소월의 시는 분명 시적 형식의 독창성을 확립하고 있다. 그는 서구시의 형식을 번안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던 한국 근대시의 형식에 새로운 독자적인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시적 형식은 전통적인 민요의 율조와 토속적인 언어 감각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토착어를 민요적 리듬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김소월의 시는, 바로 그러한 언어의 특성에 기초하여 민족의 정서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은 중앙서림(中央書林) 총판본이 또 하나 있다. 이 책은 표제가 진달내으로 표시되어 있다. 본문의 면수와 판형, 그리고 본문 조판 방식이나 인쇄 활자 크기가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과 똑같다. 판권지의 출판사항을 살펴보아도 표제와 총판매소만 서로 다를 뿐 모든 사항이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당시 매문사에서 왜 이렇게 겉표지의 장정을 완전히 다르게 하여 한 권의 시집을 똑같은 시기에 출판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문화재청에서는 2011225일 시집 [진달래꽃]의 한성도서 총판본과 중앙서림 총판본 가운데 보존상태가 양호한 4책을 최초의 근대문화재로 지정 등록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1951년 숭문사에서 발간한 시집 [진달래꽃]이 일모 정한모 문고에 보존되어 있다. 이 책은 해방 이후 나온 김소월의 시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증보판의 하나이며 기존 시집에 누락되었던 작품들을 대거 발굴 수록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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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의 화사집(花蛇集)

 

 

화사집(花蛇集)은 시인 서정주의 첫 시집이다. 1941년 남만서고(南蠻書庫)에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을 간행한 남만서고는 시인 오장환(吳章煥)이 운영하던 작은 출판사다. 오장환은 시 동인지 <시인부락>에서 서정주와 함께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자기 출판사에서 서정주의 첫 시집을 간행하면서 이른바 특제본(特製本)과 병제본(竝製本)이라는 이름으로 장정을 달리한 두 가지 형태의 시집을 내놓았다. 이 시집의 내제지(內題紙)를 펼쳐 보면, ‘100부 한정 발행, 1~15번은 저자 기증본, 16~50번은 특제본, 51~90번은 병제본, 91~100번은 인행자(발행인) 기증본이라고 구분하여 두고 해당 책이 그 중 번이라는 표시도 했다. 시집의 판형은 특제본의 경우 변형 A5, 전체 76면이다.

화사집의 특제본은 전통적인 황갈색 능화문(菱花紋)의 표지로 장정한 양장본인데, 비매품인 저자 기증본의 경우 책의 표지에 시인 정지용이 추사의 필체를 본떠 궁발거사(窮髮居士) 화사집(花蛇集)’이라고 직접 써넣었다. 판매용 특제본은 조선시대 전통 서적의 형태를 본떠 흰색 한지에 세로쓰기의 붉은 한자 붓글씨로 시집(詩集) 화사(花蛇) 서정주(徐廷柱)’라고 써서 표지 위에 붙였다. 당시 판매 가격은 6원이었다.

병제본은 일종의 보급판인 셈인데 반양장의 회색 표지에 시집(詩集) 화사집(花蛇集) 서정주(徐廷柱) ()’라고 가로쓰기 한자로 인쇄하여 제자(題字)를 표시했다. 본문의 편집 체제나 인쇄 방식은 특제본이나 병제본이나 그대로 일치하지만, 병제본은 인쇄용지와 장정을 달리했기 때문에 판매 가격을 180전으로 매겼다. 최근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책등에 붉은색 실로 화사집이라는 한자를 수() 놓은 호화장정본이 나와 화제가 되었는데, 이런 식으로 치장한 책은 아마도 특제본에 누군가 손을 대어 호사스럽게 표지를 바꾸고 특별히 보관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화사집에는 시인 서정주의 초기 시 24편이 모두 5부로 나뉘어 수록되었으며, 김상원(金相瑗)의 발문이 붙어 있다. 1자화상(自畫像)’에는 같은 제목의 시 1, 2화사에는 화사·문둥이·대낮·입마춤·가시내8, 3노래에는 수대동시(水帶洞詩)··서름의 강()·()·부흥이7, 4지귀도시(地歸島詩)’에는 정오(正午)의 언덕에서·고을나(高乙那)의 딸·웅계(雄鷄) ()·웅계 하4, 5()’에는 바다·()·서풍부(西風賦)·부활4편이 각각 실려 있다. 서정주가 1935년부터 1940년 사이에 동인지 <시인부락>을 비롯하여 여러 잡지와 신문에 발표했던 작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화사집의 시들은 관능미와 생명력에 대한 강렬한 찬사가 돋보인다. 초기 시의 경향을 잘 드러내어 주는 표제작 화사이라는 자연물과 순네라는 처녀를 대비적으로 등장시킨다. 기독교의 성서에 등장하는 은 인간을 유혹하여 욕망의 구렁으로 빠지게 만든 벌로 땅을 기어 다니면서 살게 되었다는 점에서 관능적인 유혹과 동시에 원죄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을 돌팔매를 하면서 따라가는 것은 뱀에 대한 혐오와 함께 관능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유혹을 동시에 말해준다. 에덴동산의 뱀과 이브를 연상하게 하는 이 시의 장면을 보면 작품 자체가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정주의 초기 시는 본연의 생명과 욕망, 관능의 미를 추구하고 있지만 그 정서의 근저에 서러움을 동반하고 있다. 자화상에서 시적 화자가 애비는 종이었다.’ 라고 언명하고 있는 것은 시인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숨겨진 본래적인 모습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비롯되는 서러움은 현실적인 삶이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슬픔이나 분노와는 다르다. 이것은 시인 서정주가 발견한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정서의 원형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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